1.27(금). 마5:13-20. 묵상 <소금과 빛>
1. 옛날에는 마당에 소금을 뿌리는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무속에서 부정을 물리치거나 악귀를 쫓을 때 소금을 뿌렸습니다. 성경도 보면 구약 시대 성전에는 제단 곁에 정결을 상징하는 소금을 두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계약을 맺을 때 소금을 두고 맹세합니다. 소금은 변하지 않기때문입니다. 이렇게 소금은 인류가 사용해온 유수한 조미료요
방부제였습니다. 특히 팔레스틴은 더운 나라여서 더욱 소금이 절실하고 중요했습니다.
2. 오스트리아에는 잘쯔부르크가 있습니다. 요즘은 음악으로 유명한 도시지만, 중세 때는 부자 도시였습니다. 서부 유럽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양질의 소금이 많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 도시 이름이 소금의 성(Salzburg)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소금 폐광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요즘은 냉장고도 다른 조미료도 다양해서 소금이 그토록 소중하지는 않지만, 중세 때는 소금이 방부제 역할을 했고 조미료 역할을 다 했습니다. 그 시대에는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서 소금이 필요했고, 맛을 낼 때도 필요했습니다.
3. 이런 소금을 두고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소중한 소금이라’고 하십니다. 요즘은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과 주님 시대와는 그 느낌이 다를 겁니다. 주님 당시에는 소금이 더욱 절실했기 때문입니다.
4.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도 빛없이 살 수 없습니다. 고대로 갈수록 빛이 더욱 절실합니다. 태양신을 섬기지 않는 종족은 없다고 합니다. 지금도 일출 보려고 하고, 보름달 보려고 합니다. 원시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빛이 소중한 나머지 빛을 숭배한 겁니다. 더구나 유대인들의 가옥 구조는 단칸방에 작은 창이 하나 있거나 아예 없습니다. 그래서 대낮에 들어가도 집안이 컴컴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감람유를 등잔 기름으로 사용했는데, 이게 식용유입니다. 그래서 집을 밝히려면 돈이 많이 들었습니다.
5.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은 주님이 우리더러 그냥 소금이라 빛이라 하지 않으시고,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에는 세상은 부패한다는 게 전제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본질적으로 어두워지고 썩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을 건지기 위해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소금과 빛을 둔다는 겁니다. 세상이 부패하지 않으면 소금이 필요 없고, 어둡지 않다면 빛이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두신 겁니다. 세상을 건지기 위해서 말입니다.
6.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대 사회적 책임을 밝히신 결정적인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결코 어두운 세상을 탓하거나, 우리의 책임을 회피하면 안 됩니다. 언제나 세상의 빛이고 소금인 우리 자신을 탓해야 하고, 또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우리의 책임과 소임을 방기하기에 세상이 어두워지고 더 부패하는 겁니다. 한 사회가 흥하느냐 망하느냐는 전적으로 빛과 소금인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달렸습니다. 우리는 이런 확신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우리나라가 잘 못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잘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제 역할을 하면 그 사회가 썩을 리 없습니다.
7. 그러면 소금은 어떻게 해야 짠맛을 내고, 등불은 어떻게 해야 등경 위에서 빛을 발할 수 있습니까? 반드시 자기희생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소금이 제 역할을 감당하려면 자신을 해체해야 합니다. 자신을 녹여야 합니다. 등불도 자신을 산화해야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연소되지 않고 어둠을 밝힐 길은 없습니다. 태양도 자신을 소모하면서 빛을 내는 겁니다. 한 알의 밀알도 썩어야 30배든 60배든 100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자신을 녹이고 태우는 만큼 세상의 부패를 막고, 빛을 밝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자기희생을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도 자신의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세상 사람들과 같은 풍습으로 살아갑니다.
8.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며,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했는데, 현대 교회는 이런 빛과 소금의 역할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오가는 사람에게 밟히고 있습니다. 원래 등불이 꺼지면 매운 연기만 납니다.바닷물에는 불과 3%의 염분이 바다를 지킨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는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많은 숫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혼란스럽고 어지럽습니다. 다 짠맛을 잃은 겁니다. 그리스도인 본연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9. 마지막으로 ‘소금과 빛’이 왜 ‘빛과 소금’이 되었을까요?
예수님은 소금을 먼저 말씀하시고 빛을 언급하셨는데, 요즘 기독교는 그 순서를 바꿔 버렸습니다.
빛을 앞세우고, 소금을 뒤에 두는…그 빛도 작은 빛이기 원치 않아 ‘큰 빛’을 강조합니다.
소금은 자기를 녹여 스며들어 세상을 바꾸는 사역입니다.
빛은 ‘아름다운 행위’(τὰ καλὰ ἔργα)가 우리의 identity가 되게 하는 삶입니다. 소금은 자기를 부인하여 세상에 맛을 내는 ‘배어듬’입니다. 빛은 십자가를 짊으로써 ‘좋은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본되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빛을 앞세울 때의 심리는, 자기를 드러내 세상에 자랑하는 공명심으로서의 ‘영광’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 다시 자기를 부인하여 녹아 배어드는 소금으로 시작하여, 그 삶의 결과가 갈보리에 우뚝 선 ‘죽음의 십자가’로 세상의 본이 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