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마27:1-10 묵상
<가룟 유다의 최후>
1. 오늘 본문은 가룟 유다의 최후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이 되어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에 의해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졌습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이 빌라도에 넘겨지자 문제가 심각해졌음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한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는지를 보게 된 것입니다.
2. 그는 예수님의 사역 방향에 실망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뜻대로 움직여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구석에 몰리신다면 사역 방향을 바꾸시진 않을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그런 생각이 아니었더라도 이렇게 처형당하는 쪽으로 쉽게 넘어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3. 유다는 후회하며 다시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갔다가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소연하였습니다. ‘내가 죄 없는 사람을 배반하여 피를 흘리게 하였소. 나는 죄를 지었소.’ 돈을 줄 테니 예수님을 풀어달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는 이를 통해 스스로 죄책감에서 해방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권력자들은 냉담했습니다. 그들은 가롯유다의 요청을 냉정하게 거절했습니다.
4. 가룟 유다는 크게 낙심하였습니다. 예수님을 팔았다는 죄책감, 예수님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절망감,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악한 행동에 대한 분노,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무력감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결국 유다는 돈을 성전에 내던지고 물러가서 목 매어 죽었습니다.
5. 대제사장들은 그 돈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습니다. 사람의 피 값으로 지급한 돈이니 성전에 넣을 수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악에는 무감각하면서 성전의 거룩함에만 집착하는 모순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그 돈을 거두어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들의 묘지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마태는 이것을 예레미야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하였습니다.)
6. 가룟 유다의 실수는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 그리고 용서하심을 끝까지 신뢰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의 배신은 본질적으로 베드로의 배신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결정적 차이는 예수님의 용서하심에 대한 신뢰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가장 비참한 죄악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을 신뢰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떠한 죄악을 지었든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가 그것보다 더 크기 때문입니다.
7.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은 ‘자신이 의지와 노력으로 죄인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전제를 놓치 않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괴롭힙니다. 힘들고 어려운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실망하게 됩니다. 이 실망은 예수님 없는 교만한 자기 실망입니다. 심지어 가룟 유다와 같은 절망적 상황까지 자기를 이끌고 가게 됩니다.
8.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 앞에서 자신에 대해서는 완전히 절망하고 동시에 예수님의 은혜에는 완전한 희망을 품어야 합니다. ‘예수님 앞에 서보니, 나는 완전한 죄인이다. 나는 어찌할 수 없는 죄인이다. 그러나 이러한 나를 놀랍게 사랑해주시고 십자가의 은혜를 허락하셔서 완전히 용서해주셨다.’ 우리는 이러한 고백을 하게 될 때 놀라운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9. 이 기쁨이 우리를 예수님 닮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힘을 줍니다. 매 순간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게 된다면 우리는 실망하지만 역설적으로 희망을 얻게 될 것이요, 예수님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희망을 찾으려 애쓰지만 결국 절망하게 됨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주의 긍휼하심을 바래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