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1(월).23 욥34:1-30 <균형잡힌 영성과 신앙>
1. 요즘 "서울의 봄"이라는 영화가 세간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저도 그 시대적 배경속에서 대학 생활을 했었기에 가슴 아픈 부분에 공감이 됩니다.
2. 그런 역사적 시대상 속에서 신학생들의 모습은 확연히 달랐습니다. 보수적인 배경의 학교를 다니던 신학생들은 사회가 어찌되었든 오직 기도, 오직 천국을 말했습니다. 반면 진보적인 배경의 학교를 다니던 신학생들은 복음이 어찌 되었든 오직 정의, 오직 민주주의만을 외쳤습니다.
3. 반면 제가 공부했던 신학교 에선 교수님들 부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게 오직 중립. 오직 사랑만을 말했습니다. 그런 통전적 신앙이 최고의 신앙이고 신학이란 교수님들의 입장이 젊은 신학도들의 가슴에는 여간 답답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4. 왜 이런 말씀을 드리나 하면 엘리후가 그런 통전적 신앙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말은 맞으나 듣는 이에 따라 답답하고 밉기까지한 캐릭터입니다. 오늘 본문은 엘리후가 행한 4번의 변론중 2번째에 해당합니다.
5. 그의 말을 잘 살펴보면 맞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맞는 말이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어야지 소금을 주면 사람은 고통스럽고 위험한 상태가 되듯이, 아무리 맞는 말이라고 하더라도 적용되어야 하는 시점이 있는 것입니다.
6. 엘리후는 고통받고 있는 욥에게 말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제대로 나아갔느냐 라고 질타합니다. 너는 진정 으로 회개했느냐고 책망을 합니다. 젊은 엘리후는 열정적 이고, 박학다식하며, 남의 이야기를 오래 참고 들어주던, 훌륭한 신앙인이자 괜찮은 사람입니다.
7. 그런데 그에게는 긍휼함이 없었습니다. 설득과 감화의 3요소인 에토스(인품.인격), 파토스(공감. 감성), 로고스 (논리. 이성)중에 파토스- 공감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원래 파토스의 어원에 고통과 병을 함께 짊어진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8. 그런 면에서 보면 엘리후의 말을 들어보면 너무 옳은 말인데 와 닿지가 않습니다. 욥의 상황에 대한 위로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것은 그들의 상황을 함께 살피고 위로해주고 복음이 상황과 함께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9.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완벽한 논리적인 말보다는 따뜻한 손내밈과 배려를 하며 살앗으면 좋겠습니다. 타인을 정죄히가보다는 상대방의 상황을 공감하며 위로하는 복음 전도자가 되면 좋겠습니다.
10. 하나님. 한쪽으로만 치우치지 않는 균형잡힌 신앙인 되기를 원합니다. 사랑을 잃어버린 하나님의 공의만을 말하지 않으며, 또 하나님의 정의를 외면한 사랑과 자비만 구하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경외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즐거워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