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월). 마22:23-33 묵상 <부활에 대한 논쟁>
1. 마22장은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과 변론을 펼치는 장면들이 이어집니다. 22장 초반부에서는 바리새인과 헤롯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논쟁을 시작했다면 오늘 본문은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질문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2. '사두개'은 솔로몬 시대의 대제사장이었던 ‘사독’이란 인물을 승계한 이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제사장, 대제사장 그룹이었고,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회의였던 산헤드린 공의회의 다수파를 점하고 있었습니다. 로마 권력은 이들과 협조하여 이스라엘을 통치했고, 이들은 그 댓가로 큰 부와 특혜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일제 강점기에 큰 부와 특혜를 누렸던 친일 조선인 귀족들과 유사합니다).
3. 사두개인들은 제사장 그룹이었기 때문에 성전을 매우 중요시했고, 율법 그중에서도 모세 5경을 특히 강조했습니다. 이들은 모세5경에 ‘부활’ 개념이 거의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예수님께서 부활을 이야기하는 것을 비판하기 위해 논쟁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선에서 가장 합리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4. 당시 유대인 문화에서는 형의 아내가 죽으면, 동생이 그 형수를 자기 아내로 받아들이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과부가 홀로 살아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에 그녀를 보호한다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 관습을 이용해 예수께 부활의 난제를 물어본 것입니다. 첫째 형이 죽어 그 아내를 둘째가 받고, 둘째가 죽어 셋째가 받고 이런 식으로 일곱째까지 받아서 한 아내에게 일곱 명의 남편이 생겨버린다면, 부활 이후 이 아내의 남편이 누구인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5.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얼마나 상식적이지 않은지를 물어본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그 문제에 대답하시지 않고, 그 문제의 전제인 ‘부활’의 개념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은 단지 지금 살고 있는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또 이후에 보여주신 부활은 그러한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사두개인은 그저 합리적 이성 안에서 생각할 뿐, 그 이성을 초월한 하나님의 신비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6. 성경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나, 야이로의 딸, 나사로, 다비다, 유두고 등 많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났으나 이 사건들을 ‘부활’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다시 죽었고 잠시 육체가 회복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선포하시고 보여주신 ‘부활’은 ‘새롭게 창조된 몸’, ‘하나님 안에 있는 새존재의 형식’, ‘더 이상 죽지 않은 새로운 몸’, ‘죽은 생명에서 죽지 않는 생명으로 옮겨진 몸’, ‘영생’을 의미합니다.
7. 이 부활은 우리가 이해하고 경험할 수 없기에, 아직 우리가 온전히 알 수 없는 것이요, 신비적인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이 생각한 부활은 이전으로 돌아간 몸이라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부활은 완전히 새로운 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이요,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난 부활이요, 살아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드러난 부활이라 선포하셨습니다.
8. 이 부활은 우리 생각의 방식 밖에 있는 초월적 선포이기에 우리는 믿음과 소망. 사랑으로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머니의 자궁안에 있는 아이가 바깥세상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우리는 예수님을 신뢰하여 최후에 임할 부활과 새 하늘과 새 땅과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할 뿐입니다. 이 놀라운 부활 생명의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9. 하나님,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일 뿐 아니라, 함께하시며 생명을 지키시는 분임을 기억하게 하여 주옵소서. 때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날 수 있을 때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