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4(수). 롬9:19-29 <하나님의 절대주권>
1. 문제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에 산다는 것 자체가 곧 문제 가운에 있다는 것과도 같은 말입니다. 언제나 삶의 문제로 부딪히고 고민하고 아파합니다. 뭔가 바르게 살아보려고 하면 할수록 문제를 더 많이 만나게 됩니다. 좀 잘 살아보려고 하면 할수록 고민도 많고 장애물도 만납니다.
2. 이럴 때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만나면 환경을 탓하고, 부모를 원망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은 없다 하고, 하나님을 불공평하다고 말합니다. 19절이 그런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는데, 우리가 더 이상 어떻게 살 수 있냐는 것입니다.
3.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충분한 후원을 받지 못해서 더 나은 인생이 될수없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환경을 탓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성격을 탓할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런 삶의 상처와 아픔에 대한 보상을 어디서도 받을 수 없다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할 수 있습니다.
4. 이런 불만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그러면서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예레미야 18장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5. 그러나 사실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좋은 비교는 못됩니다. 왜냐하면 진흙은 대꾸도 못하고, 질문도 못합니다. 진흙은 생각도 없고, 느낄 수도 없고, 괴로워하지도 않고, 고민도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고민하고 아파합니다. 괴로워하고 슬퍼합니다. 만약 인간에게 말할 권리가 없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폭군이지 아버지일 수는 없습니다.
6. 그렇다면 왜 바울은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바클레이라는 주석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은 지금 이 말을 하기 원했던 것이 아니라, 이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했다고 설명합니다. 결국 사도바울이 이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들만을 구원하셔야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혈통적 유대주의와 유대인들의 거만한 질문과 항변과 생각' 때문입니다.
7. 이제 우리는 오늘 우리의 상황에서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어지는 22-23절은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자신이 결정하신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진노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 진노를 쏟아 부으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오래 참으심으로 긍휼을 베푸시고, 영광스럽게 만드셔서, 그 영광의 부요함을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게끔 은혜를 베푸셨는데 너희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는 뜻입니다.
8. 27-29절에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이 인용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우리는 다 죽을 존재이지만,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죽은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소수(남은 자/그루터기/씨)를 살려 주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법대로 한다면 우리도 소돔과 고모라처럼 다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살았으니 감사해야 합니다.
9. 우리는 이 땅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아픔과 고통에 대한 이유를 다 알 수 없습니다. 나중에 하나님 나라에 가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우리가 살아있음으로 인해 삶의 빚진 자임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의로 사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은혜로 사는 것이라면 우리는 하나님께 은혜의 빚을 진 자들임에 틀림없습니다.
10.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마음입니다.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하신 하나님, 자격 없는 자를 자격 있게 하신 하나님, 본래부터 부족하고 흠이 많으며, 성격도 괴팍하고, 날마다 고민과 방황 속에 살아가는 우리를 자녀로 부르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