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라는 현실 앞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는게 인
간입니다. 내 삶이 소중한 것처럼 타자의 삶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
람은 자기 좋을 대로만 살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유 의 한계를 수
용합니다. 바로 이런 태도로부터 도덕 혹은 윤리가 나타납니다.
죄에 대해 설명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겠습니다만, 저는 죄란 타자와
더불어 살아감에 있어서 자기한계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를 세계의
중심에 놓으려는 무한 욕심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인간의 인간다움은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일에서 발생합
니다. 남들이야 어찌 되든 제 욕심 채우는 일에 몰두하는 것, 이런 자기
중심성이 세상 모든 문제의 근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것을 '자
기 속으로 구부러진 마음'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타자들의 세계에 눈을 뜨고. 그들의 고통
과 아픔을 덜어 주기 위해 마음을 쓰는 이들이야말로 죄의 인력으
로부터 자유로워진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이미 고질병이 된 인간
의 죄성은 의지로 척결되지 않습니다. 산정에 겨우내 쌓인 눈이 봄
볕을 만나야 녹는 것처럼, 은혜의 경험 없이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
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은혜와의 접속이 일으키는 변화
는 근원적입니다. 은혜는 타자의 세계에 눈을 뜨게 만듭니다. 그들
이 겪고 있는 고통이 나의 고통으로 여겨집니다. 그 고통을 자기 속
으로 받아들여 녹여내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죄로부터 벗어날 때
비로소 이웃 사랑이 가능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가리켜 "타자를 위한 존
재"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문구이지만,
자기를 타자를 위한 존재로 여기고 사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
다. 타자에게 다가서려는 우리 옷자락을 누가 계속 잡아당깁니다.
"우리를 두고 가려느냐? 이제 우리의 관계가 끝났다는 말이냐?" 옛
사람입니다. 옛 사람의 인력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죄는
힘이 셉니다. 폴 틸리히는 죄를 소외시키는 힘이라고 정의합니다.
멀어지게 한다는 말입니다. 죄는 나와 타자 사이의 관계를 벌어지게
만듭니다. 반면 사랑은 잡아당기는 힘입니다. 잡아당기는 힘이 매력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