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목). 마18:21-35 묵상 <용서에 대하여>
1.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형제가 나에게 잘못한 일이 있을 때 몇 번이나 용서하면 됩니까? 7번까지면 충분하겠지요? 베드로는 아주 넉넉하게 숫자를 잡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보통 3번까지 용서하면 된다고 생가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전통보다 2배 이상이나 되는 숫자입니다.
2. 베드로는 이 기특한 생각에 예수님의 동의를 얻겠다고 물은 겁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22절에서 7번씩 70번이라도 용서하라고 예상외의 답변을 하십니다. 유대인에게 7은 완전함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7번 용서하라 하여도 완전하게 용서하라는 뜻인데, 7번을 70번씩 용서하라는 것은 완전함을 완전함으로 곱하여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3. 사실 이러한 완전한 용서는우리엑 너무나 힘든 일입니다. 우리가 상처 받고 마음이 무너지고 인격이 훼손될 때, 가해한 사람을 용납하는 것, 한 사건을 잊는 것조차 어렵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 무한히 그리고 온전하게 용서하는 것은 사실 우리에겐 불가능에 가까운 것입니다.
4.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우리의 상처받은 마음을 외면하시는 걸까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말씀하심으로 우리에게 정죄감을 주려고 하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용서를 강조하시는 이유를 이어서 말씀하시는 비유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정체성이 ‘용서받은 자’, ‘용납받은 자’, ‘사랑받은 자’, ‘이해받은 자’, ‘초대받은 자’라는 것을 깨닫기 원하셨습니다.
5. 이 비유에는 3명의 인물이 나옵니다. 주인과 종, 종의 동료입니다. 주인은 하나님, 종은 우리, 동료는 우리 이웃을 상징합니다. 주인은 종에게 만 달란트를 탕감해주었습니다. 이 돈은 종이 감당할 수 없는 돈이었습니다. (일당을 100불로 환산하면, 30억달러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이 종이 그 탕감을 받고 나가는 길에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약 $3500) 빚진 동료를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6. 주인은 자기는 만 달란트를 탕감 받고서 다른 동료의 백 데나리온도 탕감해주지 않은 종을 보며 격노했고, 종을 다시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종의 입장에서는 백 데나리온도 큰 돈이었을 것입니다. 자기에게는 그 돈도 급했기에 동료를 감옥에 가두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실수는 자신이 무엇을 받았는지는 잊고, 자기가 받아야 할 것만 생각한 것입니다.
7. 우리도 때때로 우리 안에 있는 분노, 상처, 질투, 욕심, 고통에만 집중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들이 우리에겐 너무 큰 문제이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기 집중적 태도가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용납해주신 하나님을 잊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용서하지 못하는 태도가 곧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되는 것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8. 예수님께서 7번씩 70번을 3.9(목). 마18:21-35 묵상 <용서에 대하여> 1.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형제가 나에게 잘못한 일이 있을 때 몇 번이나 용서하면 됩니까? 7번까지 용서하면 충분하겠지요? 베드로는 아주 넉넉하게 숫자를 잡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보통 3번까지 용서하면 된다고 생가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전통보다 2배 이상이나 되는 숫자입니다. 2. 베드로는 이 기특한 생각에 예수님의 동의를 얻겠다고 물은 겁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22절에서 7번씩 70번이라도 용서하라고 예상외의 답변을 하십니다. 유대인에게 7은 완전함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7번 용서하라 하여도 완전하게 용서하라는 뜻인데, 7번을 70번씩 용서하라는 것은 완전함을 완전함으로 곱하여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3. 사실 이러한 완전한 용서는우리엑 너무나 힘든 일입니다. 우리가 상처 받고 마음이 무너지고 인격이 훼손될 때, 가해한 사람을 용납하는 것, 한 사건을 잊는 것조차 어렵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 무한히 그리고 온전하게 용서하는 것은 사실 우리에겐 불가능에 가까운 것입니다. 4.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우리의 상처받은 마음을 외면하시는 걸까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말씀하심으로 우리에게 정죄감을 주려고 하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용서를 강조하시는 이유를 이어서 말씀하시는 비유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정체성이 ‘용서받은 자’, ‘용납받은 자’, ‘사랑받은 자’, ‘이해받은 자’, ‘초대받은 자’라는 것을 깨닫기 원하셨습니다. 5. 이 비유에는 3명의 인물이 나옵니다. 주인과 종, 종의 동료입니다. 주인은 하나님, 종은 우리, 동료는 우리 이웃을 상징합니다. 주인은 종에게 만 달란트를 탕감해주었습니다. 이 돈은 종이 감당할 수 없는 돈이었습니다. (일당을 100불로 환산하면, 30억달러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이 종이 그 탕감을 받고 나가는 길에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약 $3500) 빚진 동료를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6. 주인은 자기는 만 달란트를 탕감 받고서 다른 동료의 백 데나리온도 탕감해주지 않은 종을 보며 격노했고, 종을 다시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종의 입장에서는 백 데나리온도 큰 돈이었을 것입니다. 자기에게는 그 돈도 급했기에 동료를 감옥에 가두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실수는 자신이 무엇을 받았는지는 잊고, 자기가 받아야 할 것만 생각한 것입니다. 7. 우리도 때때로 우리 안에 있는 분노, 상처, 질투, 욕심, 고통에만 집중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들이 우리에겐 너무 큰 문제이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기 집중적 태도가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용납해주신 하나님을 잊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용서하지 못하는 태도가 곧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되는 것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8. 예수님께서 7번씩 70번을 용서하라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7번씩 70번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용납 안에서만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 놀라운 사랑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그 사랑을 더욱 바라보고, 더욱 간구하며, 더욱 사모하기를 원하십니다.
9.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온전히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 자기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용서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는 우리를 먼저 품어주시고 사랑해주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믿는 우리는 그 사랑에 늘 우리의 마음을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용서와 사랑을 흘려보내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10.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그 사랑을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며, 그 사랑 그대로를 이웃에게 흘려보낼 수 있게 하옵소서. 잃어버린 자들도, 범죄한 형제도, 심지어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은 자라도, 저들을 주님께로 돌이키고 이끌어오는 수고를 아끼지 않게 하시며, 용서하고 사랑하되 끝까지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주님을 닮은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용서하라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7번씩 70번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용납 안에서만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 놀라운 사랑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그 사랑을 더욱 바라보고, 더욱 간구하며, 더욱 사모하기를 원하십니다. 9.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온전히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 자기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용서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는 우리를 먼저 품어주시고 사랑해주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믿는 우리는 그 사랑에 늘 우리의 마음을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용서와 사랑을 흘려보내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10.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그 사랑을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며, 그 사랑 그대로를 이웃에게 흘려보낼 수 있게 하옵소서. 잃어버린 자들도, 범죄한 형제도, 심지어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은 자라도, 저들을 주님께로 돌이키고 이끌어오는 수고를 아끼지 않게 하시며, 용서하고 사랑하되 끝까지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주님을 닮은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