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화).23 욥34:31-35:16 <우리가 겸손해야할 이유>
1. 욥기서도 어느덧 종반부가 가까워졌습니다. 엘리후가 하는 말이 끝나면 이제 곧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고, 42장에서 욥의 감동적인 결론이 나옵니다.
2. 흥미로운 것은 욥은 이전 세 친구들과 변론할 때는 엘리바스 ,빌닷, 소발의 연설에 꼭 대응과 항변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엘리후의 논리에 대해서는 욥이 반론을 펴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신학적인 여러 논쟁이 있습니다만 어쨌든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3. 사실 엘리후의 소리는 벽같이 답답하고 무거움으로 다가 오지만 이 엘리후의 논리도 상당히 우리가 귀기울일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엘리후의 네 번에 걸친 연설 중에서 세 번째 부분입니다.
4. 35장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대목은 엘리후가 욥이 드리고 있는 탄식과 기도에 대한 지적입니다. 오늘 본문 에는 욥이 비참하게 된 이유에 대해 엘리후가 판단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그는 욥의 기도관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합니다. (9-14절)
5. 이 말은 욥이 먼저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신다는 말에 대한 비판입니다. 엘리후가 볼 때 욥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이유는 세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가 제시하는 세 가지 이유는 욥의 교만(12절), 공허한 부르짖음(13절) 그리고 믿음과 확신의 부족(14절)입니다.
6. 이런 지적들이 다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앞서 세 친구의 논리 주장들이 그랬듯이, 이 공식만으로 욥의 고난과 처지를 다 이해하지도, 설명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절대 수학 공식처럼 될 수 없습니다. 단순하지도 않고, 훨씬 더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7. 지금 엘리후는 자기가 생각하는 신앙적 논리와 공식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욥을 희생시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엘리후는 비록 앞의 세 친구보다는 더 지혜롭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지혜의 한계를 드러내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습니다.
8. 엘리후는 하나님을 절반만 알았습니다. 욥도 하나님을 절반만 알았습니다. 우리는 절반이하도 모를수 있습니다. 엘리후가 자신은 하나님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모습 가운데 제 자신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더 겸손해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9. 그럼에도 엘리후의 말중에 정확히 동의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나를 지으신 하나님’, ‘밤에 노래를 주시는 자’라고 묘사합니다 (10절). 하나님은 그의 말대로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먼 곳에 계시는 하나님이지만, 동시에 우리와 늘 동행하시며 우리 인생의 밤에도 노래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10. 아버지. 당신은 우리가 감히 예측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으며, 저 멀리 아득한 곳에 계신 분임을 압니다. 그런데 그렇게 멀리 계시는 분께서 오늘도 우리 곁에,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또한 믿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겸손함 가운데 주님과 동행하도록, 주님을 더 알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