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3(수).23 욥36:1-25 <하나님을 위한다는 말>
1. 총 42장으로 구성된 욥기에서 엘리후의 설교가 32장부터 37장에 걸쳐 무려 6장에 달합니다. 이 6장은 각각 4편의 설교로 구성되어 있는데, 오늘 본문은 엘레후의 4번째 설교에 해당합니다.
2. 어제도 묵상했지만 엘리후는 다른 세친구들에 비해선 하나님과 그분의 일에 대해서 보다 균형잡힌 시각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치명적은 단점은 자기논리와 이성의 한계에 갖혀서 하나님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3. 그래서 그의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것입니다. 욥의 고난에 대해 설교하는 오늘 본문도 그러합니다. 엘리후가 세 친구들과 차이가 있다면, 세 친구들은 고난이 죄로 인한 것이라고 주장한 반면 엘리후는 고난은 의인에게는 연단의 수단이라는 것까지 파악했다는 점입니다.
4. 엘리후의 말을 정리하면 그는 '고통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말합니다(8절) 즉 고통은 1) 살아온 삶을 돌아보아 스스로를 바로잡게 하고(9절) 2) 죄를 깨달아 돌이키게 하며(10절) 3) 악을 심판하여 경계로 삼게 하고 (17절) 4) 하나님의 전능하신 통치와 다스림을 알게 한다 (22절)는 것입니다.
5. 이렇듯 인생이 당하는 고통의 의미를 연산법칙처럼 딱 결론이 맞아 떨어지면 좋기는 하겠습니다. 그러나 살아보니 우리가 당하는 고통중에는 의미를 다 알수 없는 경험도, 시간도, 사건도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6. 고통에는 의미가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오히려 더 큰 고통이 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엘리후처럼 모든 고통의 상황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때로 고통보다 더한 폭력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의미를 가르쳐주기보다 때론 곁에 있어 주며 말없이 "토닥토닥" 지켜주는 것이 나을 때도 많이 있습니다.
7. 저는 묵상을 하며 엘리후처럼 행동하는 제 자신을 보고 한 가지를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동안 제가 "하나님을 위한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해왔다는 것입니다. (2절- 나를 잠깐 용납하라 내가 그대에게 보이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아직도 할 말이 있음이라)
8. 엘리후는 어떻게 해서든 자기 주장에 욥이 귀를 기울여 주기를 바라며 자신의 말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우리도 많은 말을 하고 살아갑니다. 그 말중에 하나님을 위한다는 말도 기꺼이 합니다.
9. 그러나 우리가 하는 많은 말가운데 그 말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위한 말들인지, 아니면 자신을 위한 말인지를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말로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내 자신을 위한 말을 너무나 많이 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10. 하나님은 욥에게 고통의 이유에 대해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고통의 심오한 뜻을 이해시키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다만 욥의 모든 말들을 다 듣고 있었음을, 고통의 날들에서 눈을 돌리거나 외면하지 않고 고통 중에 너는 혼자가 아니다라고 말씀해주고 계실뿐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고통보다 큰 위로입니다.(15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