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수).24 시102:12-28 <고개들어 주를 보라>
1. 어제 본 시102편은 삶을 아주 무거운 것으로 짓누르는 것 같은 상황에 쓴 탄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2. 그러나 본문이 어제와 같은 탄식으로만 끝났다면 시편은 신세타령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12절부터 그의 시각을 자신의 처지에서 이제껏 경험했던 은혜의 주를 기억하며 바라보기 사작합니다.
3. 그 증거가 하나 있습니다. 1-11절에는 ‘나’ 또는 ‘내’라는 단어가 24번이나 나옵니다. 이 열 한절에 ‘나(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 절이 하나도 없습니다. 시인은 모든 초점이 자신에게만 맞추어 있었기에 탄식할 수 밖에 없습니다.
4. 그러나 12-22절까지에는 ‘나(내)’라는 단어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반면에 ‘여호와’라는 단어는 8번이나 나옵니다. 시인의 시선이 바뀐 것입니다.
5. 시인의 시선이 자신으로 향할 때에는 아무런 소망이 없었는데, 시선이 하나님을 향하니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참된 소망은 나의 시선과 마음 즉 믿음을 주께로 다시 향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6. 우리는 자주 하나님이 연약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인생을 돌보신다는 사실을 인정 하면서도 끊임없이 불행하다고 느낍니다. 속절없이 괴롭다고 탓합니다.
7. 그러나 믿음은 내 시선을 바꾸는 작업입니다. 생각의 전환을 하는 일입니다. 시인처럼 혼자 있다고 느낄 때, 가까운 사람들이 다 떠났다고 느낄 때, 기도 중에 하나님을 만난다면 그것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는 것입니다.
8. 믿음의 시선을 회복하면 그동안 안 보이던 것들이 보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의 고난을 넘어서서 고난당하고 있는 조국을 기억하며,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회복시켜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9. 그리고 그 회복 속에 자신의 회복도 있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25-28절). 시인이 조국을 위해 기도하고 조국의 회복을 소망할 수 있었던 것은, 유한한 사람이나 소멸될 세상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10. 하나님께서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인생도, 죽은 것 같은 조국도 회복시켜주시고, 살려주실 수 있는 분이신 것을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의 연약함이 이렇게 능력의 주님을 드러내는 복된 기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