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화). 마21:1-11 묵상 <나귀타신 임금님>
1.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입니다. 갈릴리에서부터 줄곧 걸어오신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거의 앞둔 상황에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 어떤 분으로 이 땅에 오셨는가를 의도적으로 보여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2. 본문은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오신 예수님은 마지막 주간을 보내시는 장면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예루살렘에 모인 순례자들은 거의 50만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주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나귀를 끌어오게 하시고(2),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데, 이는 스가랴 9:9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4~5).
3. 이 메시아 예언은 무력(武力)으로 로마를 뒤엎는 왕이 아니라, 무력(無力)하게 보일지라도 겸손히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는 왕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메시아의 통치는 칼과 무력이 아니라, 사랑과 겸손으로 섬기는 왕이시라는 메세지를 보여 주십니다.
4. 그러나 이 모습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메시야와는 다른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세상의 왕은 멋진 군마를 타고 입성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고 성으로 들어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언된 메시야라는 사실과 함께 그분이 걸어가실 승리의 길은 힘의 과시가 아닌, 고난과 겸손으로 이어질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겸손한 왕이기에, 스스로 낮아져서 모든 사람을 섬김으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의 소망이 됩니다.
5. 여기서 재미있게 눈여겨 볼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2절을 보면 예수님이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명하신 대로 나귀와 나귀 새끼를 모두 끌고 왔습니다. 예수님이 그 위에 타셨습니다. 예수님이 타신 것은 나귀일까요, 나귀 새끼일까요? ‘그 위에’라고 번역된 말은 직역하면 ‘그것들 위에’입니다. 설마 예수님이 두 마리를 동시에 타고 가신 것일까요?
6. 스가랴의 예언에 따르면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탔지만, 옆에 나귀를 대동하고 함께 가신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혹은 나귀를 타고 나귀 새끼를 대동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7절에서 ‘그것들 위에 타시니’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우리말 번역에는 단수로 표현되었지만, 헬라어 본문으로는 복수입니다.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그것들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것들 위에 타시니’가 정확한 번역입니다.
7. 왜 예수님은 나귀와 나귀 새끼를 다 끌고 오게 하신 것일까요? 또 왜 그 둘을 함께 타고 가신 것일까요? 나귀가 지칠 수 있으니까 교대로 타시려고 그러신 것일까요? 그런 단순한 이유보다 좀 더 심오한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가고 계시는 예수님이 그 십자가의 길에 제자들을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그 길이 제자들도 참여하여 함께 가야 하는 길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8. 예수님은 스스로 죄인의 모습으로 낮아지셔서 십자가의 자리로 가십니다. 나귀가 되어 그 길을 가십니다. 그런데 그 길에 나귀 새끼를 대동하고 가시며 우리에게 십자가의 길로 함께 가자고 초청하십니다. 피가 흐르는 그 자리, 십자가 앞에서 피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리, 나귀 새끼처럼 겸손하게 엎드려 애통하는 그 자리가 오히려 새생명이 흐르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9.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시며 하나님 나라는 철저히 세상의 기준과 다르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몸소 그 다름을 보이십니다. 그 다름은 세상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고 살아가는 왕으로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함께하는 왕의 모습을 보이십니다. 혹 지금도 나귀를 탄 임금이 초라해 보이십니까? 무엇을 탔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따르는가가 중요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0. 하나님, 오늘도 무엇을 타고 무엇을 보여주는가? 무엇을 가졌는가?가 중요한 세상에 젖어 삽니다. 그러기에 나는 초라하고, 내가 믿는 하나님은 초라한 것처럼 여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따르는가를 다시 생각하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며, 우리의 왕으로 오신 말씀을 이루신 그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살아가는, 이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