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주일).24 행2:37-47
<우리가 어찌 할꼬?>
1. 베드로는 천대받은 직업과 지역 출신입니다. 그런데 그의 첫설교는 권위가 있었고, 담대했으며 엄숙 했습니다. 청중들은 이 말씀에 마음이 찔렸다는 반응을 보입니다.(37절)
2. "찔리다"는 헬라어로 "카타뉘소" 라고 하는데, 땅에 말발굽이 움푹 파이다는 뜻입니다. 짧은 설교이지만 그 정도로 영적인 힘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3. 이 말씀을 대한 청중들의 반응은 '우리가 이제 어찌할꼬'라는 탄식 이었습니다. 말씀은 '평가의 대상'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반응하며 나의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4. 우리 시대에 설교자나 청중이나 오늘 내게 주신 말씀을 듣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붙잡고 '내가 어떻게 살것인가'를 고민하고 씨름하는 사람들이 매우 적어졌습니다.
5. 현대 교회의 비극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우리가 이제 어찌할꼬"라는 자성과 탄식이 사라져가고 있는 이유도 큽니다.
6. 앤서니 드 멜로라는 영성신학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든채 태어나서, 잠든채 살며, 잠속에서 혼인하고, 잠속에서 자녀낳고, 깨어나 본적이라고는 없이 잠속에서 죽어간다"며 영적인 잠에 취한 현대인들을 질타했습니다.
7.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를 '깨우시는 일'은 우리에게 복입니다. 말씀으로 '마음에 찔림을 받는 것'은 은혜입니다. 말씀을 나에게 어떻게 적용할까 고민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8. 흔히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중 예수의 제자로 결단한 사람의 숫자가 3천명이나 된 일에 촛점을 맞춥니다. 그러나 숫자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회개한 것'입니다. '세례받기'를 결단한 것입니다.
9. 누가는 회개와 세례를 받은 사람들을 헬라어 "푸쉬케"라는 구별된 단어를 처음 사용해서 부릅니다. 41절에 신도라고 번역된 단어입니다. "살아난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이 3천명이 다 제자가 되지는 못했다는 사실이 사도 바울의 선교현장에서 드러납니다.
10. '신도가 우리의 최종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 '진리와 변화에 합당한 삶'을 사는 <제자>가 최종 모습입니다. 주 안에서 내 자아가 매일 죽고 복음과 진리로 다시 살아나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