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0(화). 롬11:25-36 <후회하심이 없는 부르심>
1. 우리는 지난 주일 아버지의 날을 맞이해서 예배드리며 '탕자 이야기'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비유에는 이해가 잘 안되는 세사람이 등장합니다. 집나간 탕자의 마음과 행동 그리고 염치는 이해가 안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2. 그런가하면 그의 형인 장남도 착한 척, 의인인척하는 또다른 탕자로소 장남의 역할을 잘 못하는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이고, 탕자를 품어주는 아버지의 사랑도 이해가 잘 안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얼마전 세상을 떠난 팀켈러 목사님은 이런 아버지를 가르켜 탕부 하나님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3. 아버지 곁에서 한결같이 살아왔던 큰 아들 입장에서 보자면, 아버지의 이러한 처사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큰 아들의 견지에서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삼켜버린 아들을 복권시키고 잔치를 여는 아버지의 처사는 불공평 그 자체였고 이해할 수없는 일이었습니다.
4.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는 일은 이스라엘에게는 못마땅한 일이었고, 이스라엘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처사에 등을 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이스라엘의 모습이 끝이 아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큰아들과 같이 구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며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25절).
5.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주신 선택의 은총을 그들의 우둔함이나 불순종으로 인해 거두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의 우둔함과 불순종을 통해 당신의 구원을 이방인에게 이르게 하시며, 마침내는 큰 아들 같은 유대인들을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의 우둔함과 불순종에도 당신의 구원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보며 바울은 ‘신비’라 합니다.
6. 이처럼 인간의 불순종까지도 구원의 소재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신비 안에서 우리는 현실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지니게 됩니다. 인생의 광야에서 생명의 강을 흐르게 하시는 깊은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며, 사막같은 현실에서 신앙인의 기도를 통해 하늘문이 열리는 깊은 은혜를 보는 것입니다.
7. 바다같은 헤쳐가기 어려운 현실의 벽을 앞에두고 절망할 때 지팡이 하나로 바다에 길을 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경륜을 믿으며 나아갈 때 우리의 절망은 소망이 되는 것이고, 탄식과 한숨은 변하여 감사와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비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8. 그래서 이런 하나님의 신비를 믿고 바라보는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33-36절).
9.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사막과 광야 같은 현실 속에서, 심연에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깊고 풍성한 하나님의 신비를 향한 저희의 믿음이 더욱 깊어지게 하여주셔서 구원을 완성해 가시는하나님의 신비를 목도하게 하여주십시오.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