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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eng Gil Song
2023년 2월 01일
In 일반 게시판
2.1(화) 마7:1-12 묵상. <비판과 분별> 1. 산상수훈 마지막 부분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자칫 격언이나 잠언 정도로 여기면서,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그만인 것처럼 읽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이 세상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는지, 그 나라 삶의 방식을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 관계에서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사는것입니다. 2. 오늘 본문도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먼저 7장 1~5절에서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통해, 최종적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자리를 훼손하지 말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는 비판 그 자체에 대한 일체의 금지가 아니라,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다른 사람에 대한 정죄와 심판하는 마음을 예민하게 살필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3. 6~15절에서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 안에 있는 이기주의와 우월주의, 자기 의에 사로잡힌 오만함에 대한 경고입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와 내 눈 속에 있는 들보에 대한 비유는, 죄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 말씀에는 단순히 다른 사람의 죄보다 나의 죄가 큰 것을 인정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라는 가르침을 넘어선 가르침이 들어있습니다. ​ 4.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드러난 죄를 말합니다.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드러나지 않은, 우리 속에 깊이 감추어진 죄를 말합니다. 드러난 죄는 빙산의 일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하는, 그래서 인정하지 않는 엄청난 죄, 지독한 죄가 우리 마음에 도사리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거울로 잠시 보지만, 곧 잊어버립니다(약 1:23-24).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겉으로 드러난 죄만을 보면서 판단하고 정죄하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짓을 합니다. 5. 자신 안에 이런 엄청나고 지독한 죄가 있음을 깨달은 자는 그 죄의 지독한 냄새 때문에, 그 죄의 감당할 수 없는 무게 때문에 애통합니다. 그 죄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로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붙듭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사는 십자가의 길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받아들입니다. ​ 6. 하나님은 죄인은 사랑하지만, 죄는 싫어하십니다. 죄는 하나님께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더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죄를 씻고자 하는 소원이 없는 자와 함께 계실 수가 없습니다. 최소한 겉으로 드러난 죄만큼은 씻음을 받은 자, 그리고 속에 아직 더러운 죄가 남아 있더라도 그 죄를 씻으려는 의지와 소원이 있는 자에게 하나님은 성령으로 함께 하십니다. 항상 함께 계시며, 말씀으로 죄를 씻어주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7. 자신 안에 있는 죄가 얼마나 지독하고 더러운 것인지를 깨달은 자는, 단지 예수님 믿고 옛 죄를 용서받은 것으로 '구원 끝!', 이라며 환호하지 못합니다. 구원이 시작되게 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면서도 아직 남은 구원을 위해 두렵고 떨림으로 경주를 계속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죄의 잔재가 완전히 제거될 때까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의가 그 속에 가득해질 때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일을 계속합니다. ​8.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구하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기껏 구하는 것이 돈이나 건강, 명예, 쾌락입니다. 죄를 이기는 능력, 거룩의 은혜를 구하지 않습니다. 한두 번 구해서 은혜를 누렸어도 금방 잊어버리고 은혜를 등한히 해버립니다.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너무나 크고 더러운 죄를 해결할 길이 없어 애통하게 되는 것이 복입니다. ​ 9. 그러나 자신이 지독히 더러운 죄인이며, 그것을 해결하는 데에 너무나 무기력함을 철저히 깨달은 자는; 전적으로 맡기는 도움 곧 은혜를 요청합니다. 간절히 요청합니다. 불쌍히 여겨달라고 긍휼히 여겨달라고 필사적으로 매어 달립니다. 이렇게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은혜를 주십니다. 거룩한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말씀을 쏟아부어 주십니다. ​ . 10. 예수님은 왜 세 번씩이나 다른 단어를 사용하셔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말씀하셨나요? 끈기와 열정을 가지고 계속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선하시고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신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때문에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해야 ㅎ는 것입니다. 11.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 눈에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에 좋은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종종 하나님은 떡이라고 주시는데 내가 보기에는 돌로 보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원망하고 불평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정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나에게 좋은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이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때 풍성한 응답이 여러분의 것이 될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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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eng Gil Song
2023년 1월 31일
In 일반 게시판
1.31.(화) 마6:19-34 묵상. < 염려를 대하는 자세> 1. 그리스도인의 삶은 골방에 들어가서 조용히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깊이 소통하는 영적 생활이 있지만, 동시에 골방 문을 열고 나와서, 세속에 거친 바람과 마주치며 매일의 삶을 꾸려나가야 하는 일상생활이 있습니다. 이 일상생활에는 먹는 문제, 입고 덮는 문제, 자고 누울 수 있는 안식처의 문제에다가, 숱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서로 용서하고 평화를 이루는 다사다난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이 문제들을 소홀히 여기거나 또는 초월하여 살면서 '딴 세상 사람'처럼 살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상생활을 해나가야 할지 가르쳐주십니다. 무엇보다 일상의 문제에서 치열하게 부딪히는 두려움과 염려의 문제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2. 먼저 (마 6장) 19~25절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보물은 단지 돈과 물질에만 국한된 단어가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어디에도 쌓을 보물이 없는 가난한 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돈일 수도 있고, 재능과 지식일 수도 있고, 믿고 의지해야 하는 자녀들일 수도 있을 겁니다. 이 보물을 하늘에 쌓아둔다는 것은 어딘가에 축적해 놓으라는 뜻이 아니라, 팔아서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에 쓰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지금 내 몫이라고 하는 이 소유에는 다른 사람의 몫이 함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3. 두번째로 염려와 상관된 문제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에 편입되어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이시기에 어떤 것에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몸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은 매번 먹고, 입고, 자는 문제에 매여 있기 때문에 염려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을 향해 우리 주님은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시면서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책망하십니다. 4. 여기 '믿음이 적다'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불충분하다"는 것으로,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도 천부께서 보살피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먹고 사는 그 문제에 대해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모른 채 하겠느냐 이런 말씀입니다. (25~31절) 염려는 하나님 아버지 되심을 의심하고 불신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다함없는 사랑과 능력보다는, 우리의 부족함에만 함몰되어서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모른 채 갈팡질팡하게 됩니다. 5. 오늘 본문에는 세 번의 '그러므로'가 나옵니다. (25,31,34절) 이 세 번의 '그러므로'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뒤에 '염려(걱정)하지 말아라'라는 표현이나 그런 의미를 담은 말이 온다는 점입니다. 이 짧은 본문 중에 염려하지 말라는 표현이 왜 여러 번 나오며, 게다가 왜 인과관계와 결론요약의 연결사 다음에 나올까요? 염려하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염려하지 않는 것은 신앙과 삶에 너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6. 염려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염려하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24절) 염려를 극복하지 못하면 결국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게 됩니다. 즉, 염려는 두 주인을 섬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재물은 결코 재물만 섬기라고 하지 않습니다. 재물은 언제나 염려를 미끼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라고 합니다. 염려를 극복하지 못하면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라는 그 유혹에 넘어가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7. 염려 극복의 방법은 구할 것을 바로 구하는 것입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구하는 것은 이방인 즉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의 기도입니다. 염려를 극복하는 기도, 예수 믿는 자의 기도는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이 아니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기도입니다(32절). 나의 통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구하고, 나의 옳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옳음을 구하는 기도가 염려를 극복하는 기도입니다. 8.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했으면 '그 다음'으로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구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의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하면'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에 대한 염려 해결 방법은,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절로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된다고 하십니다. 염려를 버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내가 옳다 생각하는 삶에서 하나님이 옳으심을 인정하는 삶으로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 신자가 살아야 할 올바른 삶입니다. (33절) 9. 오늘도 염려할 수밖에 없는 내 삶의 어지러운 문제들이 있겠지만, 그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시선으로 그 문제를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맡겨드리면 좋겠습니다. 어찌 할 수 없는 곤고함과 곤란함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을지라도, 우리의 가슴에 하나님 나라를 향한 그 열망 하나 오롯이 키워나갈 수 있다면, 조금 전까지의 염려들이 새로운 시각으로 보이면서 우리를 기도의 길로 이끌어줄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의 염려들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서 "아버지"하고 맡겨드립시다. 오늘은 오늘의 선물만 누리는 그 하루를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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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eng Gil Song
2023년 1월 30일
In 일반 게시판
1.30.(월) 마6:1-18 묵상. <누구에게 보이려는가?> 1. 사실 사람들은 다른 이들에게 보이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으면 동기부여가 잘 안 되서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신앙은 그 본질적 의미를 추구하며, 그 믿음의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인데 신앙조차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2. 오늘 본문은 <구제와 기도와 금식>에 대해 말씀하시고 있지만, 이 세 가지를 이끄는 구절은 1절의 말씀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1절). 이어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2절)라는 말씀으로 구제할 때 이리저리 떠벌이지 말고, 은밀하게 하라고 가르치고 있고, 이어진 기도에 대한 말씀도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5절)고 하시며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보이려고 하지 말고, 은밀한 중에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3. 이어지는 금식에 대한 말씀도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16절)라고 말씀하시며 남들이 내가 금식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은밀한 중에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두 남들에게 보이려고 하지말고, 가능한 한 은밀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4. 자신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구제하고(율법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정해진 기도 시간에 남들이 다 알 수 있도록 드러나게 기도하고, 금식하고 있다는 것을 티나게 드러내면서 금식하는 것은 온전한 신앙의 모습이 아니라고 주님은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5. 구제 자체가 목적이라면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됩니다. 주님은 심지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3절) 하실 정도로 은밀하게 구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이 드러나지 않아도 어려운 지체들을 돕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알리려는 마음은 2절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는 욕심 때문입니다. 착하고 믿음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내가 하는 구제와 선행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아주실 것입니다(4절). 그러나 그것을 내가 드러내고, 내가 영광을 이미 받으면 하나님께서 주실 상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6.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정해진 기도 시간에 기도하는 것이 관습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관습과 전통을 잘 지키는 것이 신앙이 좋은 사람인 것으로 인정 받게 되다보니 자기가 기도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봐주길 바라면서 일부러 사람들의 눈에 띄는 곳에서 기도하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이기에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하려면 골방에 들어가서 은밀히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6절).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는 진솔하기 어렵습니다. 7. 그래서 주님은 기도의 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9절부터 13절 말씀은 주기도문이라 불리는 기도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내용에 대해서 일목요연하게 잘 가르쳐주시고 있습니다. 이 주기도문의 내용을 보면 우리가 무엇에 대해서 기도해야 할 것인지를 잘 알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8. 14절과 15절의 말씀은 12절에 나오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말씀의 부언 설명으로 보입니다. 사죄(謝罪)의 기도를 드릴 때 우선적으로 기억할 것은 “나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였는가?”하는 것입니다. 나는 내 죄를 용서 받기 원하면서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먼저 용서한 후에 하나님께 나아와 사죄의 기도를 드려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9. 16절에서 18절에 나오는 금식의 문제도 마찬 가지입니다. 금식할 때 오히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말씀하십니다(17절). 사람들은 내가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길 원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내가 40일 금식을 몇 번 했다”는 식의 말을 하면서 은근히 자기가 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려고 합니다. 지금은 덜하지만, 예전엔 기도를 많이 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목소리를 쉰 목소리처럼 내는 경우까지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금식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의 간절함을 토(吐)하는 기도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금식은 그 간절함이 반감될 것입니다. 진정한 간절함은 오직 하나님만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10. 우리의 신앙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자꾸 남에게 보여주려는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결국 외식적(外飾的) 신앙생활이 되기 쉽습니다. 구제든, 기도든, 금식이든 오직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만 집중하면서 행해야 할 것들입니다. 혹시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기도하고, 예배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구제하고, 친절하게 행하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다보면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리기 더욱 쉽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향해서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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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eng Gil Song
2023년 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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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묵상 포인트 (1/29-2/4) - 마 5:33-8:13 *5:33-48에는 5:20부터 소개한 하나님 나라 삶의 방식으로서 새로운 의 가운데 나머지 세가지, 맹세 (33-37; 레 19:12), 보복(38-42; 출 21:24), 원수 사랑(43-47: 레 19:18)이 이어집니다. 맹세함으로 자신의 말의 진실 여부를 입증하려는 자기 중심의 어리석음을 멀리해야 합니다. 가해자들을 법대로 한다며 대적하기 보다, 억압하는 자들의 요구에 더 응해 주고 원수까지 사랑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시며, 비이기적인 제자도의 삶을 가르치십니다. 이것이 구약 율법에 감춰진 하나님의 본연의 뜻이며,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닮아가는 모습입니다(48). *5:20 이하에서 인간관계에서의 의를 다루었다면, 6:1-18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로 옮겨갑니다. 예수님은 종교인들의 관행적인 세 가지 의무인 자선, 기도와 금식을 다루는데, 6:1은 2-18의 서론적 요약입니다. 위선적이며 과시하는 종교 행위를 피하고, 은밀한 구제(2-3), 은밀한 기도(5-7)와 은밀한 금식(16-17. 참고 사 58:6-7)으로 하나님의 보상을 믿고(4, 8, 18) 임해야 합니다. 9-13은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향한 하늘 아버지의 영광과 제자 공동체의 일상을 위한 기도의 모범을 가르치시고, 14-15은 용서받기 위해 먼저 용서하라시며 주 기도문의 후반부를(12-13) 강화합니다. *6:19-34는 앞선 일용할 양식을 위한 요청과 연결되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염려에서 해방된 하나님 나라 중심의 일상을 살라고 하십니다. 6:19-24 소유가 있는 곳에 마음이 있기에, 이 땅에 쌓아둠으로써 눈이 흐려져 그 마음에(22-23) 하나님과 재물(맘몬)이라는 두 주인을 섬기게 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25-34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재물에 영향받는 생활의 염려를 내려 놓고,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할 것을 거듭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에게 가장 취약한 부분입니다. *7:1-12 상호 정죄를 삼가하되 건전한 판단력을 가지고(1-6),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6:33) 기도 응답에 인내해야 합니다(7-11). 대접받고 싶은 대로 이웃을 대하는 것이 관계의 황금률입니다(12). 7:13-27 멸망의 넓은 문이 아닌 생명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13-14). 참 제자도와 거짓 제자도는 말이 아니라 삶의 열매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15-23). 말씀을 듣고 순종으로 실행함이(이 단어가 모두 아홉 번 나온다) 모래 위가 아니라 단단한 바위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24-27). 7장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으로 끝맺습니다(28-29). *5:20부터 48절까지 예수님은 의롭다고 존경받던 종교인들의 옛 것이 아닌,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 삶의 방식으로서 새로운 의를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의 형식으로 여섯 가지 예를 소개하십니다. 먼저, 살인(분노와 화해 21-26), 간음(음욕 27-30), 이혼(아내 버림 31-32)을 하나님 나라의 법정을 염두에 두고 다루십니다. 이번 주도 매일성경을 따라 묵상하면서,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 성취해가시는 일들의 의미를 곱씹으며 우리들의 일상을 걸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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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eng Gil Song
2023년 1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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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금). 마5:13-20. 묵상 <소금과 빛> 1. 옛날에는 마당에 소금을 뿌리는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무속에서 부정을 물리치거나 악귀를 쫓을 때 소금을 뿌렸습니다. 성경도 보면 구약 시대 성전에는 제단 곁에 정결을 상징하는 소금을 두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계약을 맺을 때 소금을 두고 맹세합니다. 소금은 변하지 않기때문입니다. 이렇게 소금은 인류가 사용해온 유수한 조미료요 방부제였습니다. 특히 팔레스틴은 더운 나라여서 더욱 소금이 절실하고 중요했습니다. 2. 오스트리아에는 잘쯔부르크가 있습니다. 요즘은 음악으로 유명한 도시지만, 중세 때는 부자 도시였습니다. 서부 유럽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양질의 소금이 많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 도시 이름이 소금의 성(Salzburg)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소금 폐광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요즘은 냉장고도 다른 조미료도 다양해서 소금이 그토록 소중하지는 않지만, 중세 때는 소금이 방부제 역할을 했고 조미료 역할을 다 했습니다. 그 시대에는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서 소금이 필요했고, 맛을 낼 때도 필요했습니다. 3. 이런 소금을 두고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소중한 소금이라’고 하십니다. 요즘은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과 주님 시대와는 그 느낌이 다를 겁니다. 주님 당시에는 소금이 더욱 절실했기 때문입니다. 4.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도 빛없이 살 수 없습니다. 고대로 갈수록 빛이 더욱 절실합니다. 태양신을 섬기지 않는 종족은 없다고 합니다. 지금도 일출 보려고 하고, 보름달 보려고 합니다. 원시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빛이 소중한 나머지 빛을 숭배한 겁니다. 더구나 유대인들의 가옥 구조는 단칸방에 작은 창이 하나 있거나 아예 없습니다. 그래서 대낮에 들어가도 집안이 컴컴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감람유를 등잔 기름으로 사용했는데, 이게 식용유입니다. 그래서 집을 밝히려면 돈이 많이 들었습니다. 5.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은 주님이 우리더러 그냥 소금이라 빛이라 하지 않으시고,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에는 세상은 부패한다는 게 전제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본질적으로 어두워지고 썩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을 건지기 위해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소금과 빛을 둔다는 겁니다. 세상이 부패하지 않으면 소금이 필요 없고, 어둡지 않다면 빛이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두신 겁니다. 세상을 건지기 위해서 말입니다. 6.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대 사회적 책임을 밝히신 결정적인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결코 어두운 세상을 탓하거나, 우리의 책임을 회피하면 안 됩니다. 언제나 세상의 빛이고 소금인 우리 자신을 탓해야 하고, 또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우리의 책임과 소임을 방기하기에 세상이 어두워지고 더 부패하는 겁니다. 한 사회가 흥하느냐 망하느냐는 전적으로 빛과 소금인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달렸습니다. 우리는 이런 확신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우리나라가 잘 못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잘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제 역할을 하면 그 사회가 썩을 리 없습니다. 7. 그러면 소금은 어떻게 해야 짠맛을 내고, 등불은 어떻게 해야 등경 위에서 빛을 발할 수 있습니까? 반드시 자기희생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소금이 제 역할을 감당하려면 자신을 해체해야 합니다. 자신을 녹여야 합니다. 등불도 자신을 산화해야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연소되지 않고 어둠을 밝힐 길은 없습니다. 태양도 자신을 소모하면서 빛을 내는 겁니다. 한 알의 밀알도 썩어야 30배든 60배든 100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자신을 녹이고 태우는 만큼 세상의 부패를 막고, 빛을 밝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자기희생을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도 자신의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세상 사람들과 같은 풍습으로 살아갑니다. 8.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며,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했는데, 현대 교회는 이런 빛과 소금의 역할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오가는 사람에게 밟히고 있습니다. 원래 등불이 꺼지면 매운 연기만 납니다.바닷물에는 불과 3%의 염분이 바다를 지킨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는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많은 숫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혼란스럽고 어지럽습니다. 다 짠맛을 잃은 겁니다. 그리스도인 본연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9. 마지막으로 ‘소금과 빛’이 왜 ‘빛과 소금’이 되었을까요? 예수님은 소금을 먼저 말씀하시고 빛을 언급하셨는데, 요즘 기독교는 그 순서를 바꿔 버렸습니다. 빛을 앞세우고, 소금을 뒤에 두는…그 빛도 작은 빛이기 원치 않아 ‘큰 빛’을 강조합니다. 소금은 자기를 녹여 스며들어 세상을 바꾸는 사역입니다. 빛은 ‘아름다운 행위’(τὰ καλὰ ἔργα)가 우리의 identity가 되게 하는 삶입니다. 소금은 자기를 부인하여 세상에 맛을 내는 ‘배어듬’입니다. 빛은 십자가를 짊으로써 ‘좋은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본되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빛을 앞세울 때의 심리는, 자기를 드러내 세상에 자랑하는 공명심으로서의 ‘영광’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 다시 자기를 부인하여 녹아 배어드는 소금으로 시작하여, 그 삶의 결과가 갈보리에 우뚝 선 ‘죽음의 십자가’로 세상의 본이 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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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eng Gil Song
2023년 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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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목).마5:1-12 묵상 <팔복> 1.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5장부터 7장은 산상수훈(The Sermon on the Mount)이라고 이름 지어진 유명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산에 올라가 앉으시고, 제자들이 예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1절).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시작되었습니다(2절). 2. 가장 먼저 말씀하신 것은 팔복(八福)인데, 팔복을 영어로는 The Beatitude라고 합니다. 참된 행복이란 의미입니다. 진짜 행복을 말합니다. 얼마전 우리는 설날을 보냈는데, 새해를 맞이하며 우리는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를 주고받습니다. 우리는 복을 참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복은 가짜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 땅에서 건강한 것,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것, 명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 권력을 얻는 것 등의 성공을 머릿속에 그려가며 그것을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3.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이 땅에 잠깐 있다가 없어질 것들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그러한 것들이 진정한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가 추구할 진짜 복은 무엇인가를 팔복을 통해 잘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4.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복과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함, 애통함, 온유함, 의에 주리고 목마름, 긍휼히 여김, 마음이 청결함, 화평하게 함, 의를 위해 박해를 받음" 등은 언뜻 보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복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행하는 자가 복이 있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런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해주시고 있습니다. 5. 팔복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예수님께서 복이 있다는 말하는 자의 모습은 이 세상에서 오히려 이용당하고, 불이익을 겪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삶의 현실에서도 복 받은 자라고 보기 어려운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행하는 자들에겐 하늘에서 상이 크다고 말씀하십니다(12절). 6. 즉 진짜 복은 이 땅에서 누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팔복 이후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팔복에 대한 연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7. 복 받을 자들이 실제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부연하여 가르치시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진짜 복을 누릴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말씀해주시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복은 이 땅에서의 것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물론 이 땅에서 누리는 복도 주어질 것이고, 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복은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복입니다. 그것이 진짜 복입니다. 8.이것에 대해 우리의 태도가 분명하게 결정된다면, 산상수훈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기가 훨씬 부드워지지 않을까요? 하늘의 복을 사모하며 새날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8벌이 아니라 8복> 1. 이제와 생각해보니 벌이 아니고 복이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하게 되었기에 주님 앞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2. 이제와 생각해보니 벌이 아니고 복이었습니다. 눈물나고 애통했던 그 일로 주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3. 이제와 생각해보니 벌이 아니고 복이었습니다. 그 때 맞서지 않고 참았던 일로 주님이 나의 기업이 되어 주셨습니다. 4. 이제와 생각해보니 벌이 아니고 복이었습니다. 죄가 아닌 의에 대한 목마름으로 인해 주님이 주신 생명수로 나의 마음을 채울수 있었습니다. 5. 이제와 생각해보니 벌이 아니고 복이었습니다. 타인을 불쌍히 여겨지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내가 긍훌히 여김을 받아야할 존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6. 이제와 생각해보니 벌이 아니고 복이었습니다. 내 안의 죄와 욕심이 점점 사라지는 만큼 내 마음이 청결해지고 거룩하고 성결케 되었습니다. 7. 이제와 생각해보니 벌이 아니고 복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이 먼자 이뤄지니 다른 사람과의 화평도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8. 이제와 생각해보니 벌이 아니고 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순종하는 길엔 늘 오해와 핍박과 욕과 조롱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대신 그 길엔 하늘의 기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9. 믿음의 조상들이 그러했듯 세상은 몰라주고 악하게 대하지만 하나님은 아시고 화를 복으로 바꾸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10. 팔복의 삶은 하나님은 반드시 상 주시고 우리는 진정한 기쁨 안에 거할 것임에 대한 주님의 선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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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eng Gil Song
2023년 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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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수) 마4:12-25 묵상. <하나님 나라의 복음> 1. 주님이 전하신 첫 메시지는 마4:17절 나옵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또 막1:14-15에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는 것이었습니다. 2. 갈릴리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첫설교 내용이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분의 마지막 설교도 ‘하나님의나라’였습니다. 그는 부활후 40일 동안에도 ‘하나님나라’를설파하였습니다(행 1:3). 주님의 비유 중에 대부분이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예수의 설교 중에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말이 100회 이상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는 복음의 열쇠였습니다. 복음의 전 내용이었습니다. 3. 주님이 천국 복음을 위해 가장 먼저 하신 일이 제자들을 부르신 장면입니다. (18-22).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베드로와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면서 부르셨습니다.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니 그들도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4. 예수님은 인간 보기에는 보잘것없고 부족한 사람을 먼저 부르십니다. 이는 인간의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보시고 가능성을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나를 따라오너라’라는 명령은 단순히 주님을 장소적 의미에서 좇으라는 뜻이 아니라, 지금 그들이 처한 삶의 방법과 목적과 관심을 모두 청산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향하여 전환할 뿐만 아니라 그를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따르라는 희생적 의미입니다. 5. 그들은 평생을 보낸 바다에서는 베테랑이지만,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육지에서의 부르심은 전혀 다른 삶으로 부르는 초대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면서 사명을 주십니다. 그저 부른 것이 아닙니다. 복이나 주려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시도록 부르십니다. 6. 세례요한을 옥에 가둠으로써,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은 복음 전파를 막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복음이 막히는 상황에서 진짜 복음을 내어놓으십니다. 예루살렘의 유력한 자들이, 유대의 권력자들이 복음을 대적하였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복음의 사역지를 갈릴리로 옮기셨습니다. 그곳에서 복음의 증인들을 부르셨습니다. ​ 7. 때로 ​사람과 환경은 막힙니다. 그러나 은혜의 복음은 막히지 않습니다. 복음이 막힐 때는, 그 반대쪽에 진짜 통로가 열리고 있을 때입니다. 진짜 통로, 큰 통로를 여시기 위해; 가짜 통로, 사람의 통로, 작은 통로가 닫히는 것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 8. ​주님, 복음은 인간이 꼼짝없이 붙잡힌 그 시점부터 시작되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임을 인정합니다. 복음이 막힐 때, 빨리 반대쪽으로 달려가는 눈치 빠른 일군이 되게 하옵소서. 나를 바라보지 않고, 주님만 바라보며, 오직 은혜만 붙들며 따라가는 어부가 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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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eng Gil Song
2023년 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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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마 3:13-4:11 묵상 <요단의 세례, 광야의 시험> 1. 오늘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공적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두 가지 일을 하신 장면입니다. 그 하나는 세례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으신 것이며, 다른 하나는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아 이기신 것입니다. 2. 전자는 3장에 기록되어 있으며 후자는 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죄인을 위한 세례였지만(6절) 죄 없으신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십니다. 이는 죄인을 위해, 죄인을 대신하여, 죄인과 함께 죽음으로써 죄인을 살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창조하는 소명에 충성하신 것입니다. 3. 요단강의 세례는 십자가의 죽음을 미리 내다보게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죽음까지 받아들여야 할 소명인 줄 알면서도 그것만이 우리같은 죄인을 살리고 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 줄 아셨기에 순종하신것 입니다. 예수님이 침례 받으시자 하늘이 화답한다. 그 증거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 처럼 강림하신 것입니다. 4. 동시에 예수님은 광야에서 마귀에게 3가지 시험을 당하십니다. 예수님이 시험받으신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왔던 모진 시련의 장소이자 실패한 장소입니다. 이곳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신 이유는 우리에게 죄악된 현실이 마귀에게 장악된 상태임 을 알게하시고 또 이기는 방법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입니다.. 5. 첫번째 시험은 돌로 떡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두번째 시험은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이고 마지막 시험은 마귀를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5. 제가 생각하기에 이 시험의 의미는 "어때. 풍족함으로 하나님없이 살아가는 인생이 더 행복하지 않겠어?" 라고 유혹하는 것이며. 성전꼭대기는 화려한 정상이 아니라 한발짝만 잘못 디디면 추락하는 곳이자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그대로 맞을수 밖에 없는 괴로운 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일에서 뛰어 내려라. 신앙을 포기하라는 유혹입니다. 6. 마지막 시험은 천하만국과 영광을 보여주며 마귀에게 절하면 구하면 이것을 다 주겠다는 유혹입니다. 실상 이 말씀은 시편2:8절에 이미 하나님깨서 해주신 약속을 마귀가 대신 주겠다고 말한것입니다. 사탄은 말합니다. 십자가를 지지않아도.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않아도 나만 숭배하면 빠르게 성공하고 쉽게 행복하고 눈에 보이는 능력을 주겠다는 매력적인 제안입니다. 7. 이에 예수님은 다른 도구나 방법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유혹을 이겨내십니다. 마귀의 시험에 대한 예수님의 답의 중심에는 오직 하나님의 뜻과 말씀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8.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했고 불순종했던 광야의 자리를 순종과 승리의 자리로 바꾸셨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하나님 한분만을 의지할때 광야같은 우리 삶의 자리도 절망과 한숨과 눈물의 장소를 감사와 찬송과 기쁨의 자리로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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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eng Gil Song
2023년 1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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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월). 마3:1-12 <광야와 세례> 1. 광야는 성도가 정착을 고려할 곳이 아닙니다. 그러나 피해가서도 안 되는 곳입니다. 광야는 반드시 믿음으로 통과해야 할 관문입니다. 그곳에 잠시 거주하면서 믿음을 검증받아야 할 관문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는 가나안도 바로 그런 곳이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는 곳이었지만, 갈대아 우르에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온 아브라함에게 가나안은 아직 광야였습니다. 2. 그래서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취득하여 이삭에게 물려줄 재산으로 만들어가는 일에 몰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가나안 땅의 나그네로 여기고 있었습니다(창세기 23:4). 진짜 가나안은 따로 있으며, 이 땅의 가나안은 단지 진짜 가나안을 바라보게 하는 모형으로 인식하며 살았던 삶이 아브라함의 삶이었습니다. ​ 3. 세례 요한은 이 광야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 주는 신약의 인물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성도들이 어디에서 그분을 맞이해야 하는가를 자신의 삶을 통해서 보여준 사람입니다. 그런 삶을 통해 그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옷은 광야의 옷이었고, 그의 음식이 광야의 음식이었으며, 그의 말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습니다. ​ 4.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음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자들, 곧 회개(오늘 본문의 ‘회개’는 죄악을 뉘우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권을 바꾸는 행위를 말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자기가 왕이 되어 있는 나라를 버리고 하나님이 왕이신 나라를 받아들이라.’는 명령입니다)한 자들이 광야에 나가서 물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는 침례입니다. 씻는 의식이 아닙니다. 자기부인의 의식입니다. 자신의 옛사람을 모두 부정하고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양심 받기를 소원하며, 자신을 기꺼이 물에 잠그는 것입니다. ​ 5. 이런 사람들이 주의 길을 준비하는 자들입니다. 자기의 길을 버리고, 주께서 임하실 길을 곧게 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성령이 임하셔서 그 속에서부터 쭉정이들을 태우시고 알맹이만 남기는 구원 사건을 이루십니다(11-12절). ​ 6. ​​자기들이 뭔가 내놓을 것을 가진 존재-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주장하는 자들은 광야에 나가서 세례를 받을 준비가 되지 않은 자들입니다. 그들이 받는 세례는 그들이 확보하는 또 하나의 자격증일 뿐입니다. 광야에서 회개의 길을 준비하는 것과 오히려 반대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세례 주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세례는 자기 부인의 고백이지, 뭔가를 인증받는 자격증이 아닙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 좋은 열매는 자기 부인의 열매입니다.​ ​ 7.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들은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며 자기의 힘과 능력으로는 결코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합니다. 그들은 광야로 나갑니다. 자신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광야로 기꺼이 나갑니다. 그 광야에 나가서 물세례를 받습니다. 자기 부인의 믿음을 고백하며 확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 광야에서 믿는 자에게 주실 성령의 세례를 고대합니다. 세례 요한은 그렇게 광야에서 물세례를 주면서 그 광야의 길을 따라 오실 분, 성령 세례 주실 분을 기다렸습니다. ​​ 8. 주님, 자기 부인을 강요당하는 광야의 삶을 피하지 않겠습니다. 광야에서 나를 세우고, 나의 길을 개척하는 엉뚱한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셔서 내 안의 옛 것들을 불사르실 때에, 아까워하지 않겠습니다. 내 안의 골짜기와 뾰족한 언덕들을 고르게 하여 주옵소서. 주 성령께서 행하시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준비시켜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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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eng Gil Song
2023년 1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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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묵상본문 - 마 2:13-5:32 *2장 후반부에서 아기 예수의 가족은 주의 사자의 도움으로 헤롯의 학살에(16-18) 앞서 애굽으로 이주하여 난민으로 지내다가(13-15), 헤롯이 죽은 후 갈릴리 지방 나사렛으로 돌아온다(19-23). 학살을 피한 아기 모세와 출애굽의 모세를 기억나게 하는데, 이방인 방문객들이 예수님을 경배한 반면 유대인 왕가는 살해를 시도한 내러티브에 주목하라. 마태는 예수님 생애에 일어난 사건들을 설명할 때,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란 형태를 빌어 구약을 직접적으로(15절: 호 11:1; 18: 렘 31:15) 때론 간접적으로(23절) 인용한다. *3:1-12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사 40:3) 세례 요한은 하나님 나라를(‘천국’은 ‘하나님 나라’의 마태식 표현이다) 친히 가지고 오시는 예수님을 이스라엘에 소개하며 회개를 촉구한다. 세례 요한은 여러 선지자들이 예언한 하나님 나라가 건설될 때, 성령이 넘치게 부어지며(사 44:3; 겔 39:29; 욜 2:28), 종말론적인 불의 심판(사 26:11; 렘 4:4; 15:14)이 있을 것임을, 특히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경고한다. *3:13-17 소명에 실패하고 회개해야 할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이루어 가실 예수께서는 세례받으신 후에, 4:1-11 임하신 성령에 이끌려 자신의 정체성(하나님의 아들; 시 2:7)과 이 땅에 오신 목적(왕이자 고난당하는 종: 사 42:1-4)에 연관된 시험을 받으신다. 세례와 40일의 광야는 출애굽 홍해 사건과 광야 40년을 대변하고, 마귀의 시험에 신 6:13, 16과 8:3을 인용하시면서, 실패한 이스라엘과는 달리 순종하심으로 승리의 첫 걸음을 내딛으신다. *4:12-17은 옛시대와 새시대(옛언약과 새언약)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 세례 요한의 투옥 이후에야 예수께서 흑암에 빛을 비추시는 공생애 사역을 시작했다고 보고한다(사 9:1-2, 6-7). 18-21 예수님은 이방인들의 갈릴리를 출발점으로 제자들을 모으시며 이방 선교를 예시하는데, 제자들은 즉각적으로 ‘버리고 따른다’. 23-25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시며 병든 자들을 치유하면서, 그분의 권위로써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진 그 나라의 참생명의 회복을 보여 주신다. *5장은 마태복음에 실린 다섯 강화(5-7장, 10장, 13장, 18장, 24-25장) 가운데 처음이다. 각 교훈은 “예수께서 마치시매”로 마무리되는데, 5-7장에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생활 방식으로서 더 나은 의를 위한 새 계명을 보여 준다. 5:1은 시내산의 모세를 상상하게 하고, 새로운 토라로서(17-20) 교훈들을 제시하는데, 율법을 예수께서 완성하심이 그 근간이다. 2-12 그 내용은 하나님 나라를 믿음으로 약속받는 여덟 복에 이어(영적 낮음, 인간관계, 박해로 인정되어 은혜로 누리는 역설적인 복들), 13-16 그 나라의 백성들은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5:20부터 48절까지 예수님은 의롭다고 존경받던 종교인들의 옛것이 아닌,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 삶의 방식으로서 새로운 의를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의 형식으로 여섯 가지 예를 소개하신다. 먼저, 살인(분노와화해21-26), 간음(음욕27-30), 이혼(아내버림31-32)을 하나님 나라의 법정을 염두에 두고 다루신다. 이번 주도 매일성경을 따라 묵상하면서,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 성취해 가시는 일들의 의미를 곱씹으며 우리들의 일상을 걸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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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eng Gil Song
2023년 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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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토). 마2:1-12 묵상. <기쁨과 당황> 1. 오늘 본문은 성탄절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동방박사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동방’은 이스라엘의 동쪽 지역이니 바벨론이나 페르시아 아라비아 등일 것입니다.(일부 이단에서는 한국에서 재림주가 나야 하는데 그 근거로 동방을 한국으로 해석합니다. 이스라엘의 동쪽 끝이 지도상 한국이라고도 하고 더 웃긴 것은 우리나라가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으로 불리었다고 고 해서 동방은 곧 한국이라는 무식하고 근거 없는 아주 잘못된 해석을 하는 이단도 있습니다.) 2. 중요한 것은 이들의 등장을 통해서 마태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다시 재증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이방 여인들이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 있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열방의 구주라는 사실을 강조했는데 동방에서 온 이들을 통해서 다시한번 예수님은 유대인 만의 왕이나 구주가 아니라 모든 열방의 구주라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3. 공교롭게도 정작 성경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들은 배척하고 모르는데 이방인들이 오히려 예수님을 더 먼저 경배하는 일은 오늘 우리 명목상으로만 그리스도인인 경우에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참고로 동방박사는 세사람이라는 언급이 없습니다. 그 수가 얼마인지 없기 때문에 세 사람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 예수님은 모든 열방의 구주이십니다. 4. 예수님의 탄생 소식은 두가지 반응을 일으킵니다. 3절의 헤롯왕과 온 유대인들은 소동(헬라어로는 당황)한 것이고, 10-12절 동방에서온 박사들은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5. 진짜 왕이 오시면 소동이 일어납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에도 이와 같은 소동이 일어나야 정상입니다.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며 이제 참된 왕이시며 주인이신 주님을 영접하고 따르는 일에 이러한 소동이 없다면 제대로 영접하지 않은 것이든 아직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든 다시한번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6. 신앙은 왕이 바뀌는 것입니다. 나와 우상과 세상이 나의 왕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의 구주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에 소동이 없는 것이 비정상이고 소동한다면 우리 삶이 재편되는 것입니다. 7. 마지막으로 동방박사들은 꿈을 통해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고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갑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간 다른 길 그 길은 구별된 길입니다. 그러므로 의미를 부여한다면 하나님의 길이며, 사는 길이며, 생명의 길이며, 고국(본향)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8.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로 그 나라(본향,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 거룩한 길로 삶의 여정의 방향을 맞춰서 본향을 향하여 가는 순례자들인 것입니다. 마침내 이 모든 여정을 마치는 그 날이 오면 우리는 본향에 당도하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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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eng Gil Song
2023년 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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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금). 마1:18-25 묵상. <왜 여자의 몸을 통해 오셨을까?> 1.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잉태되어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도록 섭리하십니다. 이를 오해한 요셉을 설득하기 위해,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깨우치시기도 했습니다. 요셉이 온유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약혼녀 마리아는 음행의 죄목을 뒤집어쓰고 돌에 맞아 죽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 2. 왜 예수님은 이런 "불편과 위험과 오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꼭 여자의 몸을 통해서 오셨어야 했을까요? 성경은 구원 역사에 왜 이렇게 여자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일까요? 왜 여자가 구원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 3. ​​또한 왜 예수님은 꼭 성령으로 잉태되어야 하셨던 것일까요? 예수님의 신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특별한 잉태가 필요했다면 차라리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방법으로 오시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요? 신성을 더 확실히 증명하려면 남자의 몸만 통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몸조차도 통하지 않고 성육신하시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 아니었을까요?​ ​ 4. 그러나 깊이 묵상해보면 예수님이 성령으로 여자의 몸을 통해 성육신하신 것은 하나님의 완벽한 구원 계획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여자에게 임하셔서 임마누엘을 이루어가시는 것이야말로 구원의 본질임을 보여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본질은 죄로부터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분이기 때문입니다. ​ 5. 그러기에 죄인된 인간으로서의 여자는 성령으로 잉태되는 과정을 통해 반드시 "임마누엘"을 경험해야 합니다. 임마누엘의 과정을 경험하는 직접적인 당사자가 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가운데서 자기 부인이 이루어지고,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연합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 6. 신학적으로 이 여자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헬라어로 교회를 뜻하는 ‘에클레시아’는 여성 명사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대명사로 표현할 때에 ‘그 여자’(She)가 됩니다. 불완전한 인간을 품은 교회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온전한 연합을 이루는 임마누엘, 이것이 구원의 완성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죄'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렇게 된 자들이 ‘의인’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7. 하나님께서는 오직 성령으로 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마누엘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자들을 의롭다 하십니다. 임마누엘을 받아들인 이들만이 온전한 거룩에 이를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 8. 예수님의 세가지 이름 (1:16, 21, 23)-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요,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의미요,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이란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가 잉태했으며, 인류의 죄를 구속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동정녀 탄생이라는 방법을 통해 오신 것은, 구속자의 자격 요건이 완전한 신(神)인 동시에 인간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9. 예수야말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요, 임마누엘은 그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주시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이 선물과 축복이 당신의 것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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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eng Gil Song
2023년 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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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목) 마1:1-17 묵상 <복음은 폭탄입니다> 1. 유대인들의 족보 자긍심은 대단합니다. 그래서인지 마태는 복음서의 서론을 매우 지루한 족보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첫책은 재미있는 스토리가 아니라 지루한 족보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2.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아브라함입니다. 그러니 마태가 유대인을 대상으로 쓴 복음서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이라는 말로 시작한 것은 당연한 것이자 유대인들의 관심을 가장 강력하게 끌 표현입니다. 3. 마태는 마태복음을 매우 '유대적'으로 기록했습니다. 유대인의 관심사를 반영해서 그들이 읽기에 좋도록 유대적인 관점과 관심사를 중심으로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면으로, 마태복음은 철저히 '반유대적'으로 기록되었기도 합니다. 유대인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완고함과 잘못됨을 뒤집기 위해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4.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족보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메시지를 폭탄처럼 던지고 있습니다. 그 폭탄은 '유대의 족보가 향하는 궁극적 방향은 예수'라는 폭탄입니다. 이 메세지가 폭탄인 이유는 유대인들은 예수를 핍박하고 죽였던 사람들입니다. 절대로 메시야일 수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죽인 그 예수가 바로 메시야임을 마태가 족보로부터 증명해내고 있는 것 자체가 폭탄 선언입니다. 5. '수(數)신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학에서 숫자와 그 의미를 다루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숫자에 관심이 많았고 또 의미부여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7은 완전수로 보았고 7의 배수도 완전수로 보았습니다. 마태가 무리수를 두어가면서까지 족보 배열을 굳이 '14대x3' 의 구조를 유지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마 1:17) 6. 무리수를 두었다는 말은 숫자가 잘 맞지 않는데 억지로 맞추었다는 말입니다. 처음 14대와 나중 14대는 엄밀하게 말하면 13대이고, 가운데의 14대는 6명의 왕을 제외시켜 14대를 만들었습니다. 해서 억지스러운 면이 보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족보를 기록할 때 중요한 인물만 기록해서 숫자를 맞추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기록법이었기에, 마태는 그 숫자를 맞추어 예수님의 위치가 새시대를 여는 시작이 됨을 알렸던 것입니다. 7. 또한 마태는 완전수의 배열인 '14대x3'의 족보 구조를 통해 예수님 족보의 다윗적 혈통과 특성을 최대한 강조했습니다. 다윗은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한 명이었고. 그 '다윗'의 족보와 숫자적 측면을 활용해서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증명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8. 복음은 유대인들에게 폭탄이었습니다. 마태의 족보 이야기는 유대인들이 조상 대대로 배우고 믿어왔던 족보의 이야기와 달랐고, 그들이 생각해왔던 선민의식과도 달랐습니다. 메시야는 유대인들의 생각과 다르게 위대한 왕의 모습이 아니라 목수의 아들로 세상에 왔고, 이방 나라를 멸하고 유대를 높이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유대인들의 잘못된 선민의식을 깨트리고 세리와 죄인과 가까이 하며 약자에게 생명을 주는 존재로 이 땅을 살아가셨습니다. 마태는 그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죽은 그 예수가 메시야다.'라고 족보를 통해서 강력하게 선언하며 그들에게 폭탄을 던졌습니다. 9. 복음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폭탄입니다. 예수를 믿었는데,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데 내 삶에 폭탄이 떨어지않았다면, 즉 예수를 믿는데 내가 여전히 의롭고 내가 여전히 옳으며, 내가 살아가던 방식이 바뀌지 않고, 오히려 신앙을 통해 내 고집이 더 견고해진다면 그것은 예수를 잘 믿는 것이 아닙니다. 10. 우리가 말씀 앞에 매일 서야하는 이유는 말씀이 주는 생명의 충격, 생명의 폭탄이 우리 내면과 삶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깨어나서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리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말씀묵상을 하는 여러분에게 이런 은혜가 풍성히 넘쳐나기를 축복합니다. 첨언하자면 위의 사진 안에 14대는 다윗이 2번 중복되어 있고, 또 저자의 편의대로 왕들을 가감한듯 보입니다. 그래서 사진에 나타난 14라는 숫자에 집착하면 성경은 오류가 있다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듯이 마태의 직업은 세리 즉 요즘 말로 CPA 회계사였습니다. 숫자 사용에 대한 실수가 적은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그의 계산은 의도적인 것이고 성령의 명령이라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마태는 의도적으로 예수가 다윗의 계보에서 나셨음을 강조하면서도 유대인들이 그토록 열망하던 다윗의 계보를 무시합니다. 예를 들어 6절을 보면 솔로몬의 어머니를 다윗의 아내라고 하지않고 "우리야의 아내"라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다윗의 혈통으로 낳았지만 너희들이 기대하는 인간적인 왕으로서 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신 새 메시야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구약에서 예언된 분임도 함께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는 인간들이 대망하던 왕이 아니라 진짜 왕. 진짜 그리스도가 오심을 이렇게 강조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의 세계에는 오류가 없음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1월 19일 말씀묵상 content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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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eng Gil Song
2023년 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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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수) 민10:11-36 묵상<호밥이란 사람> 1. 드디어 구름이 성막 위에 떠올랐고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을 향해 출발합니다. 2. 이때 갑자기 성경에 호밥이란 인물의 등장합니다. "모세가 모세의 장인 미디안 사람 르우엘의 아들 호밥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가 광야에서 어떻게 진 칠지를 아나니 우리의 눈이 되리이다"(10:29,31) 호밥은 모세 장인 이드로의 아들입니다. 즉 호밥은 모세의 처남입니다. 호밥은 가나안 땅 미디안 사람입니다. 호밥은 광야 길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호밥에게 길 안내를 요청합니다. 3. 호밥이라는 사람이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이유는, 그가 광야의 전문가였기 때문입니다. 광야에는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길 없는 광야를 걸어서 통과하려면 광야 구석구석의 지형을 잘 아는 사람이 필요했고, 광야 전체의 구조를 아는 사람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호밥이 자신들과 함께 가주기를 청한 것입니다. 4. 모세는 이스라엘의 리더였지만 자신의 힘을 과신하지 않았습니다. 조력자가 필요한 영역에서는 과감하고 진실하게 조력자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도 사람의 지혜는 필요합니다. 각자의 가진 은사에 따라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활용해야 공동체가 살아날 수 있는 것입니다. 5.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과 고백이 있습니다. 호밥이 제 아무리 광야의 전문가라고 해도, 그가 광야 구석 구석을 잘 안다고 해도, 광야의 전체 구조를 꿰뚫다시피 한다고 해도, 그런 전문가가 함께 한다 해도 갑자기 광야에 길이 생기는 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6. 호밥이 이스라엘과 함께 했는지 아닌지 알 수는 없으나 함께 했다 해도 광야의 길을 인도하는 이는 호밥이 아니라 구름기둥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광야는 길을 찾아가는 곳이 아니라 길을 개척해 가는 곳입니다. 개척하지 않으면 길이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인생길을 개척해야 할 때 기억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개척자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7. 나의 광야같은 인생길을 만드시는 분, 내 인생 광야에서 나의 앞에서 길을 헤쳐 나가시는 분, 우리 믿음의 공동체가 걸어가야 할 길이 보이지 않는 이 광야 길에서 길을 개척해 내실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심을 고백합니다. 오직 말씀 뿐임을 고백합니다. 8. 오늘 나의 삶에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함께해 주시고 사람의 도움이 함께해 주길 기도합니다.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도와주는 사람들에게도 감사를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에게 호밥이 되야할 때 기꺼이 돕는 자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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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eng Gil Song
2023년 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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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7. (화) 민10:1~10. 묵상 <나팔소리> 1.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에 급한 소식을 전할 때 사용하던 방법으로 파발과 봉화가 있었습니다. 봉화는 불빛이나 연기로 신호를 보내는 방법이고, 파발은 말을 달려서 소식을 전했습니다. 봉화는 가장 빨리 소식을 전하는 수단이었습니다. 높은 산에서 낮에는 불을 피워 연기를 내고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습니다. 평소에는 봉화 하나를 올려 무탈함을 알리고, 외적이 나타나면 두 개를 올리고 위급한 상황에 따라 봉화의 수가 늘었습니다. 산에서 산으로 이어지는 봉화는 모두 서울의 남산을 향했습니다. 2. 파발은 보다 더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는 통신 수단입니다. 파발에는 말을 이용하는 기발과 사람의 보발이 있었는데 25~30리마다 잘 달리는 말이나 걸음이 빠른 사람들이 임무를 교대하였습니다. 이것을 역참(驛站)이라고 하는데 기차가 멈추었다 출발하는 역(驛)과 중첩하는 역사를 가진 듯합니다. 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은 나팔 둘을 만들되 두들겨 만들어서 그것으로 회중을 소집하며 진영을 출발하게 할 것이라”(민 10:1~2).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하여 은 나팔 둘을 만들도록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행진에 신호로 삼고자 함이었습니다. 행진의 출발과 멈춤뿐만 아니라 보행의 속도와 방향의 전환에도 필요했고 갑자기 쳐들어오는 적의 등장에도 대응하기 위함입니다. 4. 나팔 두 개를 함께, 또는 따로 불었고, 소리의 크기와 길이도 달리하여 신호의 의미를 정했습니다. 나팔 두 개를 동시에 길게 불면 회중이 회막 문 앞에 모이고, 하나만 길게 불면 지휘관 천부장의 회집 신호였습니다. 두 나팔이 짧게 급히 불면 동쪽 진영이 출발하였고, 두 번째로 짧게 불면 남쪽 진영이 출발하였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모을 때에는 길게 불어야 했습니다. 전쟁에 부딪히면 짧게 급히 불어 위급한 상황을 알렸고, 이스라엘의 여러 절기와 경축일에도 나팔을 불었습니다. 나팔은 훈련받은 제사장만 불 수 있었습니다. 5. 이스라엘 자손은 나팔소리에 담긴 각종 의미를 알아야 했습니다. 지금 울리는 나팔소리가 출발 신호인지, 멈춤 신호인지, 위급한 신호인지를 알지 못하면 우왕좌왕하여 혼란스럽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라면 그 신호 체계를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6. 오늘 그리스도인도 광야를 행진하는 이스라엘 자손과 유사한 역사 인식을 갖습니다. 이미 구원받았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시제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인은 늘 긴장 속에 살수 밖에 없습니다. 나팔소리의 신호에 세심하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 신호 체계를 숙지하고 그에 따라야 옳습니다. 7. 성경은 세속의 거친 광야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의 규범입니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이 매우 절실합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 아닙니다. 모르고 먹는 독약도 치명적입니다. 성경을 알지 못하면 광야 생활이 더 힘들 수 밖에 없습니다. 8. 절망뿐인 광야 같은 세상살이에도 하나님의 계수함을 받은 자로서 희망의 삶을 잇는 형제와 자매에게 주님의 선한 이끄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9. 하나님, 우리 모두 성경을 묵상할 때마다 주님의 마음에 다가가게 하시고, 그것을 실천할 때 기쁨이 넘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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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eng Gil Song
2023년 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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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1/15-21) 묵상 포인트- 본문- 민 9:1-10:36 1.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을 지킴과 동시에 출애굽했다. 이제 만 1년의 시간이 지나 유월절을 광야에서 지키게 되는데, 9장은 출애굽 이후 첫 번째 유월절 준수에 대한 규례를 다룬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인해 역사상 첫 번째 유월절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을 위한 배려로 두 번째 유월절에 대한 규례를 제공한다. 타국인이라도 유월절 지키기를 원하면 허락하신다. 신앙공동체의 일원이 되는데 중요한 것은 ‘출신’이 아니라 ‘헌신’이다. 2. 성막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봉헌하고, 성소에서 섬길 일꾼들을 구별하여 임직하고, 유월절을 지킴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새롭게 했다. 이제 광야로 떠나는 새로운 시작에 서게 된다. 앞을 알 수 없는 길이지만, 이스라엘은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성막에 임하사 언약 백성 공동체의 길을 지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땅의 길이 아닌 하늘의 길을 보고 걷는 사람들이다. 3. 이제 시내산을 떠나 가나안 땅을 향해 광야로 행진할 준비가 되었다. 성막을 봉헌하고, 유월절을 지키고, 성막 운반과 행진을 위한 모든 대열을 준비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전체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진할 때 필요한 체계적인 의사소통 방법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나팔을 제작하여 서로 간 신호를 정비한다(10:1-10). 불과 구름이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와 영광의 상징이라면, 나팔 소리는 귀로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계시였다. 4. 모든 준비가 끝났다. 출애굽 후 둘째 달 20일에 하나님의 임재 상징인 구름이 성막에서 떠올랐다(10:11). 이스라엘의 행진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지금까지 주어진 말씀을 따라 차분하게 진영을 이루고 행진을 시작하면 된다. 가고 서는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고, 어디로 갈 지 그 길도 하나님이 이끄신다. 올 한 해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의 신호를 보고 들으며 믿음으로 걸어가 보자. 마 1:1-2:12 (1/19-21) 5. 마태복음은 주후 70년 이후에 마태 또는 그의 제자들에 의해 쓰여졌다. 당시 세력을 얻던 바리새파 유대교와 갈등하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공동체에서 예수의 삶을 살기 위한 지침서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예수님을 유대인이 갈망해 온 이스라엘 소망의 성취자인 메시아이자 온전한 왕으로 그리면서, 이방인들을 돌아오게 하는 아브라함의 언약을 성취하시는 예수님의 선교 또한 강조한다. 6. 마태는 1장에서 예수님은 어디서 왔으며 누구인가에 대해 분명히 밝힌다. 1:1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genesis)를 유대인(그리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위대한 왕 다윗으로 시작하는데, 이 세 인물은 17절에 반복된다. 계보(genesis)는 창세기를 연상하게 하며 인류의 새 창조를 강하게 시사한다. 결점을 지녔다고 여겨질 만한 이방 여인 네 사람의 이름을(다말, 라합, 룻, 우리아의 아내) 포함시켜, 구약시대에 만민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를 나타낸다(1:3-6). 계보는 세 번의 열네 세대라는 단위를 이용하면서(17), 이스라엘 왕의 계보와 바벨론 유수(이스라엘 왕조의 끝)와 연관짓고 있다(2-16). ‘그리스도’라는 명칭의 반복(1, 16, 17, 18)과 함께 궁극적인 하나님 언약의 성취라는 신학적 의미가 있다. 7. 1:18-25는 임마누엘 예수(구원자)의 탄생 이야기 16절을 보충 설명하는데, 하나님의 목적이 어떻게 성취되고 있는가를 보여 준다. 그는 성령으로 마리아에게서 잉태되었고 온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할 자임을 밝힌다. 23절은 사 7:14을 인용하면서 아기가 메시아라는 충격적인 진실을 밝힌다. 누가복음은 마리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푸는 반면, 마태복음은 요셉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8. 2:1-12 유대인의 왕의 탄생을 경배하러 동방에서 온 점성술사들은(민 24:17) 헤롯을 먼저 만나고, 상황을 파악한 세상의 왕은 권력을 잃을까 두렵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날 것임을 알고 있지만 그 진실을 품을 생각이 없다(4-6). 미 5:2의 인용은 장차 온 세상을 다스리는 자로서의 예수의 신분을 나타낸다. 2장에서만 구약 인용이 네 번인데 (6, 15, 18, 23)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바가 이루어짐을 알리는 방식이다. 2023년 새해 아침에, 귀로 들은 분부대로 행한 요셉(1:24-25)과 동방박사들을(2:12) 본받아, 홀로 읽고 들은 말씀을 일상에 나타내는 삶을 소망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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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eng Gil Song
2023년 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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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토) 민8:1-26 묵상 일상이 중요할까? 예배가 중요할까? 1.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상의 삶이 중요했을까? 성막에서의 제사와 봉사가 중요했을까? *하나님은 왜 레위인을 구별해서 선택하시고 정결하라는 특별한 요구와 책임을 주셨을까? *레위인이 성막과 제사를 맡은 자였다면 지금의 목사들은 어떠해야 하는가? 성경을 묵상할수록 질문도 많아집니다. 2.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소를 섬기도록 하지 않으시고, 모든 장자가 성소를 섬기도록 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대신할 레위인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은 레위인의 직무의 중요함을 말하기도 하지만, 모든 백성들이 살아갈 일상의 중요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장자들이 살아가는 그 일상이 너무나 중요하기에, 그 일상을 열심히 살아가라고 하나님은 레위인을 데려다가 제사와 봉사를 맡도록 세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일상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를 충실하게 반영하는 삶입니다. 매일의 먹고 살아가는 삶은 결코 속되거나 수준 낮은 삶이 아닙니다. 매우 중요하고 의미있는 삶이요, 하나님이 누군가를 대신 세우면서까지 살아가도록 한 참으로 가치있는 삶입니다. 3. 그러나 일상만 중요하다면 굳이 레위인을 세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모두들 열심히 일상만 살도록 격려하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레위인을 세우셨고, 그들이 전적으로 성소를 섬기게 하셨습니다. 성막과 성소의 존재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바쁜 삶 가운데서는 그 삶을 성실하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삶을 최선을 다해 일상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바쁜 삶을 살다보면 주님을 잊을 때가 있습니다. 4.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쁜 삶의 한 부분을 쪼개서 성소를 찾아와야 했습니다. 나의 삶이 무너진 것 같을 때, 나의 마음에 아픔이 밀려올 때, 일상을 살다가 죄에 무너졌을 때, 수많은 이유들로 마음이 갈급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소를 향해야 했습니다. 이 성소 찾음의 준비를 위해 레위인에게 봉사를 맡기신 것입니다. 하지만 레위인들은 이것을 특권과 오만으로 변질시켰습니다. 5. 결국 현대인의 삶에서도 일상이 중요하지만 개인적인 하나님과의 만남도 중요하고 주일의 예배도 모두 다 중요합니다. 우리는 일상도 열심히 살아야 하지만 하나님과의 교제에도 힘을 써야 하고 예배에도 힘을 써야 합니다. 바쁜 삶임에도 말씀을 놓지 않고 주님과 교제하기를 힘써서 일상과 주님과의 만남, 일상과 예배의 균형을 잃지 않는 우리들이 되길 간절히 소원하는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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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eng Gil Song
2023년 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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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금) 민7:12-89절 묵상. <모두 함께, 빠짐없이> 오늘도 말씀의 등불이 우리의 길을 밝혀주는 놀라운 은총을 경험하는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민수기 7장은 성막 봉헌을 위해 드려진 헌물들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제 본문이 각 지파의 우두머리들이 드린 헌물을 기록했다면, 오늘 본문은 그들에 이어 모든 지파의 지휘관들이 드린 헌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용을 보면 모든 지파의 지휘관들이 성막 봉헌식이 진행되는 기간 동안 각각 하루씩 제단 앞에 헌물을 드렸고, 각 지파에서 드린 헌물은 어김없이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앞선 인구조사에서 드러났듯이, 지파마다 인구 수도 다르고, 강함의 정도도 달랐지만, 약한 지파도 강한 지파 못지않게, 같은 헌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성막이 상징하는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임재를 가능케 한 구원 사건이, 모든 지파에게 차별 없이 동일하게 은혜로 주어졌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되었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셨고, 이제 성막을 통해 그들과 함께 살아가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놀라운 은혜의 수혜자로서 아낌없는 헌신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 사실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존재하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 드리는 자발적이고 아낌없는 헌신으로 존재합니다. 은혜가 차별이 없으니, 헌신에도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을 하나같이 귀하게 받으시고, 이를 통해 당신의 나라를 확장해 가십니다. 하나님은 온 이스라엘의 헌신으로 봉헌된 성막을 기뻐하셨고, 이 성막을 통해 임마누엘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과 교제하시며 당신의 나라를 이루어가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헌신으로 봉헌된 성막으로 확증되고, 이제 완성을 향해 출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그 후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실패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동일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은혜에 반응한 사람들과 교제하시며, 그들의 헌신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매일 하나님 앞에 나와 교제하는 우리를 통해, 우리의 헌신을 통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고 계십니다. 이 놀라운 은혜에 날마다 반응하고 감격해서 헌신함으로, 하나님 나라에 동참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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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eng Gil Song
2023년 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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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목) 민7장 1-11절 묵상과 적용 “각기 직임대로 드린 헌물” 샬롬! 오늘도 주의 은혜아래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고 나누기를 원합니다. 매일 주님의 말씀이 내 발의 등불이 되고 내 길의 빛이 되기만을 구하며, 또 하루 믿음으로 시작합니다. 주께서 함께 하여 주소서! 선물로 주신 “오늘”을 감사하며 즐겁게 살게 하소서! 6장은 나실인의 법을 묵상하였습니다. 그 후 나실인이 그 서원한 대로 정한 기간 동안의 나실인법의 구별하는 법을 따라 삶을 살았을 때, 제사장의 축복이 기록됩니다. 문맥을 따라 읽으면 나실인의 서원의 삶을 축복하는 내용처럼 읽힙니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삶과 그 사명을 잘 마쳤을 때, “잘 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더욱 큰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나의 즐거움에 동참하라!” 하시는 주님의 칭찬의 음성을 듣는 듯 합니다(마25장 참고). 오늘 묵상 본문 7장은 모세가 장막 세우기를 끝내고 모든 기구와 제단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한 그 날에,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하나님께 드린 헌물을 기록합니다. 그들은 여호와께 덮개가 있는 수레 여섯 대와 소 열두 마리를 장막에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것들을 받아서 레위인에게 나누어 주어서 그들의 직임대로 회막 봉사에 사용하게 하셨습니다(4-5절). 게르손과 므라리 자손들에게 그 직임대로 나누어주고 고핫 자손에게는 나누어 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고핫 자손은 성소의 기구를 그 어깨에 매었기 때문에 수레와 소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단에 기름을 바르던 날에 지도자들이 제단의 봉헌을 위해 헌물을 가져다가 그 헌물을 제단 앞에 드리고 난 후,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지도자들’(The chiefs of Israel)은 하루 한 사람씩 제단의 봉헌물을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11절). 오늘 교회의 목회자로써 내가 주님께 드릴 봉헌물은 무엇일까? 교회와 성도들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고, 이 세상에서 거룩히 구별되는 일을 위해, 교회 지도자로써 내가 먼저 본을 보여 드려야 할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가장 먼저는 내 마음을 주님께 드려야 하고, 시간을 구별하여 드려야 하고, 몸과 물질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주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드리는 삶을 힘써 살아야 합니다. 저와 같은 목회자들이 자칫 섬김을 받는 데만 익숙하고 드리는데 본을 보이지 않는다면 교회는 정체를 겪게 되고 교우들은 인색한 마음을 품게 될 것입니다. 지금껏 교회사를 통해 볼 때 모든 아름다운 목회자들은 먼저 삶의 본을 보였습니다. 지도자들이 먼저 삶과 물질을 헌신하였기에 그래도 이만큼의 오늘날의 교회가 있는 것이라 믿습니다. 오늘 내가 부르심 받은 '사명의 자리'에서, 내가 '맡은 직임대로' 더욱 주님께 헌신하기를 기도합니다. 거짓되지 않고, 자기를 속이지 않고, "자기를 부정하고 주님을 따르기"를 기도합니다. "주여, 함께 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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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eng Gil Song
2023년 1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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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1일 말씀묵상. (민6:13-27) 지,은,평의 복 1. 민수기 6장은 소위 아론의 축복기도로 마칩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 아론과 아들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복을 빌고 어떤 복을 구할지를 알려주십니다. 2."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로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6:24~26) 요약하면 하나님이 지키시고, 은혜 베푸시고. 평강 주시기를 빈다는 것입니다.그래서 이것을 줄여 (지,은,평)의 복이라 이름 붙여보았습니다. 개인에게도 공동체에게도 지,은,평의 복은 필요합니다. 저에게도 또 여러분에게도 지,은,평이 필요합니다. 3. 그런데 한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그가 서원한 대로 자기의 몸을 구별하는 법을 따라 할 것이니라"(6:21) 나실인 즉 구별된 자가 약속한 대로 그대로 행할때. 지.은. 평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만큼 중요한 것은 기도한 대로 약속한 대로 사는 것입니다. 4.이 아침에 기도한 대로 믿고 약속한 대로 살자 다짐합니다. 지,은,평을 놓고 기도한 여러분 모두에개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와 평화의 복이 임하기를 구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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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eng Gil S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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